세월호 사건 이후 내 인생은 송두리채 바뀌었다.
이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시간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듯이 들었다. 나는 어떤 뉴스든 유심히 보기 시작했고 나의 안목을 키우려 노력했다.
그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불편한 진실들과 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뉴스들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공정하지도 않았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권선징악이라는 사자성어를 알고 있었고 어렸을 때 선생님들께서는 이것을 나에게 가르치셨다. 그 사자성어는 우리나라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그래서 도저히 나는 외면할 수 없다. 나는 그 때부터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관심을 가져야겠다. 내 기억속에 절대로 지우면 안되겠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안되겠다.
하늘이 나에게 이런 사명을 그 때부터 주신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그 당시 어린 딸이 있었다. 이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 때부터 나는 이 불편한 진실과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만큼은 투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건에 간접적으로나마 엮여있는 나로서는 정치라는 단어는 주변에 항상 둬야만 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엮이지 않더라도 만약 그 배에 우리 가족이 탔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지금 아직까지 이 정신에 글을 쓸 정도로 제 정신으로 살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생각하면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으시는 많은 분들께 죄송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이 감정을 필히 남기고 싶고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감정을 많은 분들께 전달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기록한다.
그 세월호에 내 아내 절친 교사가 계셨다. 그 분은 내 결혼식 때 우리를 축하해주셨고 내가 신혼집으로 살았던 첫 집은 조그만 집이었고 조촐한 집들이를 두번이나 참석했다. 또한 집들이를 하면서 재밌게 대화를 나누었고 고스톱을 치면서 친구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냈었다. 그녀가 내 아내의 매우 절친이라 연락처도 알고 있었다. 나의 가까운 인연이었다.
140416 약 9시경. 나는 회의를 끝내고 TV를 켰는데 YTN에서 그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단원고 학생이 타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고 혹시나 해서 그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맞다. 그 선생님이 단원고 교사이지. 내 아내도 단원고 교사였고 결혼 후 잠시 휴직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나는 단원고와 인연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분. 무사하신가. 무사하신것인가? 전화를 했다. 한 통화, 두 통화, 세 통화. 답이 없었다.
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속보에 약 270명 정도를 전원 구조를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 다행이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그 속보는 오보라고 떴다. 이게 뭐지? 내 눈을 보고 믿을 수가 없었다. 뉴스라는 것이 저런 오보를 내는게 맞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사건진행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저런 긴급한 상황에 회의참석이 매우 늦었고 또한 여러 행보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내 상식으로 도통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사실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행동이라 더 이상 기록하기도 싫다.
뉴스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실종자 명단에 내가 아는 분이 떴다. 나는 털썩 주저 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지인이 이런 사건의 희생자가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운명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는 그 말. 나는 어느 정도 믿고 있다. 세상의 하느님이 계시는지 믿게되는 사실이 나에게 하나가 있다. 140416 정확히 일주일 전 그 배를 장모님이 타시고 제주도를 다녀오셨다.
만약 그 일주일 전이 140416의 사건이 덮쳤다면 나는 정확히 그 단원고 희생자들이 당하고 고통받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나의 삶의 부분으로 안고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나에게는 그 불행은 피해가게 하셨지만 내 지인이 희생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것이 내 삶의 큰 부분을 변화시켰다.
한동안 그 분은 실종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그 실종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신 몇 분 또한 실종되었고 세상을 떠난분이 계신다. 그 구조작업에 참여하셨던 꽤 상당수분들께서는 그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으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들 중 몇 분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비극이다.
그 선생님은 한동안 실종자 명단에 계시다가 5월 7일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운명의 장난인가. 5월 8일 어버이날 전에 발견이 되었다. 그래도 그 선생님, 그 부모님께 찢어지는 가슴아픈 일이지만 결국 마지막 효도를 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마음을 추스렸다.
그 후 약 1년간 그녀가 잠들어있는 공원에 1주 또는 2주에 한번은 꾸준히 가서 소식을 전했다. 나는 당연히 군말없이 그 곳을 따라 갔다. 그러나 나 역시 직장을 옮기면서 더 이상 그 곳을 그 주기만큼 찾아가기 힘들게 되었다. 이제는 마음속으로나마 안부를 전해야 한다. 참 이 현실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고로 나는 그 때부터 정치고관여자가 되었다. 이제 나의 운명은 그렇게 되었고 그 길을 걸으려 한다.
이 글은 그 당시 세상을 떠나신 단원고 기간제 교사 이지혜 선생님을 기리며 작성했다. 그녀는 우리 아내의 매우 절친이었다. 옛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소주한잔으로 그 아팠던 기억을 달래고 있다.
그러면서 기록한다.
희생된 많은 분들이 살아계신다면 지금이면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을터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아쉽고 가슴이 아프다.
여전히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계시는 희생자 유족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건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