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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치한 작가 May 08. 2024

의암 유인석기념관을 방문했다.

13도의군 의병장 유인석. 그의 독립운동을 살펴보았다.

오랜만의 지인 방문할 일이 있어 가평으로 향했다. 며칠 간 우중충한 날씨에 반해 오늘은 파란하늘에 정말 간간히 구름을 그려넣은 듯한 끝내주는 날씨였다. 개인적으로 햇살이 따뜻한 날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긴팔을 입어도 덥지 않은 그런 날을 굉장히 선호하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씨였다. 참 맑고 좋은 날이다. 


의암 유인석 기념관을 방문하다

의암 유인석은 조선후기의 학자,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42년 출생하여 1915년에 73세 나이로 병사했다.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봉천에서 병사한 것이다. 

그의 활동과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위키디피아)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9D%B8%EC%84%9D_(1842%EB%85%84)#

해방 후 시신은 국내로 운구되어 강원도 춘천에 이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의암 유인석 건국훈장

가장 먼저 유인석기념관에 입장했다. 

유인석기념관 정면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단발령에 대한 설명이 있고 그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전시했다.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문

강화도조약으로부터 조선이 서서히 무너지는 기미가 보이자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운헌맹질(의병조직 후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로 한 맹세의 글)


의병전쟁 거의도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려고하자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된다. 수많은 의병장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의병장 중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최익현, 신돌석 등이 눈에 보이고 의병장 유인석은 호좌창의진(1895), 13도의군(1910)에 눈에 띈다. 

13도의군에 대한 설명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 그리고 홍범도 장군도 눈에 띈다. 그만큼 영향력있는 의병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우리에게 많이 유인석 의병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장면을 보면 유인석이 정말 의병장 중에서도 꽤 영향력있는 의병장이라 느낄 수 있다. 


그는 위정척사파의 강경한 학자였다. 그 강인한 신념이 느껴진다. 신분제도 철폐에 반대를 했고 다른 국가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크게 반대를 했다. 그런 것들이 나라발전을 더디게 했다는 비판도 지금 시점에서 있다. 그것이 의병운동을 하는데 있어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그 시점에서 국운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제 1의 목표였고 오로지 그것을 위해 살았던 의병장이다. 그런 비판의 요소로 그가 이루고자했던 조선을 바로세우려고 했던 열망을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유인석기념관 의열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유인석 의병장에게 참배를 하고 왔다. 한창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할 시기에 만주에서 병사했다고 하니 그 노고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지만 어떻게보면 매우 평범한 평일. 이 곳을 방문한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조용했다. 기념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그가 했던 독립운동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 곳을 떠나기 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아직 대한민국은 완전한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다.


일체 치하 35년. 교묘하면서도 야비하게 심어놓은 일제의 만행들로 인하여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생을 대한민국의 독립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이 바랬던 나라가 지금의 모습일까라고 묻는다면 아직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그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유인석기념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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