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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ozoo Dec 08. 2019

자연스러운 공간, 아모레 성수

형체 없는 브랜드 가치의 물리적 구현

(2019.12.01. 방문)


아모레 퍼시픽의 역사, 가치, 브랜드, 제품을 골고루 만나볼 수 있는 공간. 공간 구성이 훌륭한 곳이다. 여러 종류의 콘텐츠가 섞여 있는데도 난잡하거나 치우침 없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인상적이다.


아모레 성수 ⓒ 우주 OOZOO



자연스러운 공간

화장품이라는 인공적인 물품을 전시하는 곳은 대개 공간 자체도 도시적이거나 삭막한, 혹은 인공적인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아모레 성수는 자연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건물의 한 가운데가 완전히 정원이고, 꽃집이 있고, 곳곳에 식물이 있다. 화장실 안팎까지 모두 자연과 함께한다. 아모레퍼시픽이 추구하는 '자연'이라는 가치를 자연스럽지만 강력한 방법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비전과 미션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가치를 물리적으로 구현해내려는 의지가 강력했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공간이 나왔을 것이다. 마케팅만 고려했다면 절대 만들 수 없을 섬세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요즘 이렇게 작은 디테일이 눈에 띈다 ⓒ 우주 OOZOO


건물 자체를 잘 살려냈기 때문에 '성수동' 특유의 분위기도 살아있다.

구조적인 측면만 따져도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옛 자동차정비공장의 골격이 만드는 기하학적 풍경, 곳곳에 배치된 계단이 만들어내는 단차, 공간 어디에서든 바깥을 (특히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 미로 같은 동선.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공장이라는 맥락을 떠올리게 하는 마감까지도 공간 경험을 풍부하게 만든다.


원래 쓰임이 궁금했던 구조들 ⓒ 우주 OOZOO


자연을 닮은 정원도 압도적이다. 은은하고 꾸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자연답다. '우리 조경 멋있지!'라고 자랑하는 정원이 아니라, '네가 그리워했던 자연이 여기 있어'라는 느낌을 준다. 제주의 베케가든을 만든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들었다.


산이나 계곡이 떠올랐던 정원. 공간 어디서든지 보인다 ⓒ 우주 OOZOO



체험, 구매, 휴식

단순히 제품을 체험하고, 메이크업을 고치는 팝업스토어가 아니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 공간은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체험, 구매, 휴식.


체크인 후 만나는 클렌징 룸. 공간 마지막에서는 꽃집이 기다린다 ⓒ 우주 OOZOO


체험

이 공간에서는 제품을 소개하고, 아모레 퍼시픽의 가치를 알린다는 측면에서 체험이라는 키워드가 매우 중요하다. 제품을, 공간을, 서비스를 경험하는 모든 플로우가 세심하게 고려되었다.(고 느꼈다.) 화장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발라볼 만한 트릭이 곳곳에 있다(아낌없이 주는 화장 솜과 면봉, 의자 앞이나 화장실에 배치한 제품, 제품 선반 사이의 세면대 등).


같은 맥락에서 꽃집도 전혀 생뚱맞지 않다. 경험자*가 공간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정원을 옆에 두고, 화분을 지나며 자연에 충분히 익숙해지기 때문에, 동선상 가장 마지막에 만나는 꽃집은 반갑기까지 하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나를 위한 꽃 선물이라는 컨셉도 좋다.

(* 공간을 적극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방문객 대신 경험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브랜드별, 제품별로 비교하며 볼 수 있다 ⓒ 우주 OOZOO


구매

구매 전환을 유도하는 전략이 영리하게 숨어있다. 우선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는 경험 자체가 그렇다. 다양한 브랜드를 한 번에 살펴보고 비교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거기에 체크인하면 주는 샘플/할인 쿠폰, 제품마다 달린 QR코드, 카테고리별로 전시된 제품까지.


(체크인했다면) 아모레퍼시픽 몰에서 쓸 수 있는 쿠폰을 가진 상태에서 경험이 시작된다. 이 쿠폰 한 장이 구매 문턱을 낮춰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어도 '어차피 할인받을 수 있으니까, 크림도 한번 볼까?'가 되니까.

'성수마켓'이라는 존에서 샘플 5종을 받아 갈 수 있다. 직접 골라갈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 인스타그램 이벤트에 참여하면 1개 더 추가된다. 경험자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집에 와서 제품을 써보니 몇 개는 정말 구매하고 싶었다. 마침 쿠폰이 있어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봤다.


제품을 보다가 힘들면 바로 빠져나와 쉴 수 있다 ⓒ 우주 OOZOO


휴식

제품이 진열된 '뷰티 라이브러리'와 평행하게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체험 영역과 휴식 영역이 벽 하나로 나뉘는데, 두 영역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경하다가 힘들면 쉬고, 쉬다가 다시 돌아가 제품을 체험해도 된다. 어디에서든 정원이 보이는 것도 안정감을 준다.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짧아도 삼십 분, 길면 한 시간 정도 머무를 텐데, 요즘처럼 시간의 변화가 눈에 보이는 계절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이 또 다른 재미가 된다.


오설록이라는 카페 브랜드가 있어 F&B 구성도 뜬금없지 않다. 날씨가 더 좋았더라면 옥상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나도 먹었다. 히히 ⓒ 우주 OOZOO



그밖에, 운영자의 눈에 띄는 디테일들

나도 운영자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점점 보인다. 마감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건물이나 브랜드의 맥락은 어떻게, 무엇으로 전달되는지, 그리고 운영자가 경험자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같은 것들.


특히 사이니지야말로 디테일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장치다. 가장 최소한의 노력으로 경험자에게 가장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가장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경험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자리에,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결정할 수 없다.


다양한 사이니지와 자료 ⓒ 우주 OOZOO


입장하자마자 만나는 소개자료, 아모레 퍼시픽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자료 뿐만 아니라 소파 옆에 배치된 화장품(소품)의 용도, '계단 주의' 표지 같은 것들이 모두 섬세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이 물건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어떻게 쓰면 되는지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소개자료가 기억에 남는다. 종이 재질이 특이했기 때문. 기름종이처럼 반투명하고, 글자가 프린트된 면은 한지처럼 약간 거친데 뒷면은 아주 매끈하다. (거친 피부가 매끄러워진다는 은유라고 보면 내가 너무 멀리 간 것일까?) 종이 재질마저 기획/운영자에게는 결정이 필요한 사항이다. 큰 회사일수록 이런 사이니지의 톤앤매너를 아주 균일하게 맞출 수 있다. 매우 큰 장점이자 강점.


기업 역사는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보여주는 것이 낫다 ⓒ 우주 OOZOO



공간에서 플랫폼으로

공간이 그저 열려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관련 행사를 모두 이곳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메이크업 서비스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으니 원데이 클래스도 좋겠고, 식물과 관련된 무언가도 적절하겠다. 혹은 공간 자체로 풀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당연한 생각이었는지 이미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모두 마감 상태였다. (석사 논문 쓸 때도 느꼈지만 역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누구나 생각했고 이미 만들어진 경우가 태반이다. 머쓱해.)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다. 화장품에서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를 수 있고, 공간/건축에 대한 관심, 더 멀리 본다면 환경이라는 가치까지 연결해볼 수 있겠다. 앞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확장될지 기대된다.


가까웠으면 내 방앗간이 됐을 아모레 성수 ⓒ 우주 OOZOO



최근에 방문한 공간 중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시기적절한 조용한 캐럴, 온도(미세먼지 측정까지 하더라), 마음껏 흘러 다닐 수 있는 동선도 기억에 남는다. 대체로 차분하고 따뜻한 느낌이라 쫓기듯 구경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팝업스토어', '카페', '서점' 등 단일 업종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관찰자로도, 공간 기획/운영자로도 좋은 기회다. 단순히 다양한 가게를 모아놓는 공간도 많은데, 그런 곳과는 달리 열심히 고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더 즐거웠다. 5년 뒤에는 나도 이런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 아모레 퍼시픽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 이렇게 성심성의껏 리뷰를 쓰다니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 관계자 분들 보고 있나요.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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