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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ozoo Nov 30. 2020

모든 기획에는 이유가 있지

'영감의 서재 X 집무실' 팝업 이벤트 후기


(2020년 10월 17일 방문)


맑고 찬 가을 주말. 티켓팅 하기가 수강 신청보다도 어려웠던 '영감의 서재' 팝업 행사에 다녀왔다.


성공회 성당 마당에서 진행되고 서가가 준비된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알고 가서 기대보다 훨씬 좋은 경험을 했다. 성당 자체가 유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지어진 덕분에, 입구에서부터 여행지에 온 느낌이 들었다.


날씨마저 완벽해 ⓒ 우주 OOZOO


입구에서는 영감의 서재를 이끌고 계신 박지호 디렉터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서재'를 한 바퀴 돌면서 어떤 세션이 마련되어 있는지, 이용은 어떻게 하는지, 어떤 기획이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주셨다. 마치 컨시어지 서비스처럼!


시내 한 복판에서 진행된 야외 행사였지만 짧은 투어 덕분에 내가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내 서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디렉터님께서 기획 의도를 알려주는 방식이 새로운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에 쏙 들었다.


기획에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 어떤 파트너가 있는지 알 수 있었던 페이퍼 ⓒ 우주 OOZOO


서가를 구성할 때에는 '주말에 읽기 좋은 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질문 속에서 '예술 서적'과 '레시피북'이라는 주제를 골라냈고, 예술서적을 주로 취급하는 출판사와 협업하여 '요리', '건축', '예술', '서울'이라는 테마를 담은 책으로 꾸렸다고 한다.


'주말의 여유로움'이라는 키워드도 전체 기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라서, 편안한 라운지 음악과 함께 가볍게 (그러나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도시락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영감의 서재' ⓒ 우주 OOZOO


서재라는 공간은 단순히 책을 모아놓은 장소가 아니다. 서재 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담긴 공간이다. 더군다나 책을 수집한다든지, 서재에서 평화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취향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므로 서재는 라이프스타일과 세계관을 담아내는 공간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책장 앞 테이블은 향초나 테이블 램프를 통해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서재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양한 콜라보 제품들 ⓒ 우주 OOZOO


경험적으로도 좋은 날이었다. 탁 트인 마당에서 햇살과 바람을 만끽했던 토요일. 한 편에는 유럽식 건물이, 또 한 편에는 한옥이 있는 풍경과 함께.


가구 역시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단체용 테이블을 제외한 나머지 테이블에는 각기 다른 의자가 놓여있었다. 몸값 높은 디자인 가구 같았는데, 실내용처럼 보여 행사하는 동안 흠집이 생기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다 (직업병).


꼼꼼하게 구성된 파스타 도시락도, 뱅쇼도,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화분도 하나같이 예뻤다. 나를 위해 준비한 테이블에서 즐기는 미니 피크닉 같은 느낌.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어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장면들 ⓒ 우주 OOZOO


기획자는 스스로 설계한 세계가 완결성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 시간과 그 자리에 바로 '그것'이 있어야 할 이유들은 모두 기획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어떤 행사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도 모두 나름의 이유가 깃들어있다. 행사장에서 하필 이 음악이 나오는 이유, 하필 이 가구가 하필 그쪽에 자리를 잡은 이유 같은 것들. 천재지변 같은 외적인 상황이야 기획자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밖의 모든 것들, 그러니까 기획자가 챙길 수 있는 모든 것은 기획이다.


기획의 모든 이유가 의미를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징이 아니어도 괜찮다. '기획자 눈에 예쁘다'는 이유로 소품이 자리 잡아도 좋다. 다만 기획자의 세계에서 기획을 구성하는 것들은 세계의 완결성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서 일관된 논리 속에 존재해야 한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휩쓸어 온라인 환경에 대한 공급/수요와 환경이 잘 구축되고 있다. 대부분의 행사도 온라인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되고, 미팅도, 소모임들도, 심지어는 친구들과 떠드는 일도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나도 많은 것들을 온라인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데, 같은 워크샵을 진행해도 온라인에서는 할 말만 하는, 효율성의 특성이 도드라진다.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본다고 할지라도 실재하는 '몸'의 경험이 누락되니 오프라인의 대화만큼 밀도 있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모니터 뒤에 사람 있다'는 사실이 잘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까지의 나, 기획자로서의 나는 오프라인 행사만을 만들어 왔다. 오프라인만 고집할 수는 없으니 올 한 해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온라인으로도 몇 가지 행사를 테스트하는 중이다. 그러나 행사를,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해볼수록 온라인의 무엇은 오프라인의 무엇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으로 잘 연결될수록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만나 '제대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진다.


오프라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 뉘앙스, 분위기, 그리고 그 밖의 환경을 공유하고 경험을 함께 쌓는다는 느낌은 소중하다. 우리는 몸을 가진 인간이기에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말이라는 언어, 몸이라는 언어,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오프라인의 마법으로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고, 조금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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