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고 싶지 않은 하루

by 믈름

퇴근하는 길목에 햇빛이 예쁘게 비치는 공간이 있었다. 선명한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사선으로 스미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꼭 유명한 사진작가의 전시회에 걸려 있을 것만 같았다. 비단 나뿐 아니라 다른 행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하나 둘 가던 길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그 순간을 담아가고는 했다. 그 일련의 장면은 어쩐지 따뜻해서, 나에게는 꽤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최근에는 그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지금, 내가 그 공간에 도착할 즈음이면 주위가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언제나 변하고 만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아파트 단지 내에 마련된 작은 학교였는데,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외관이 많이도 바뀌어서 뙤약볕이 내리쬐던 스탠드에는 차양이 세워졌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던 교문에는 이제 ‘학교 방문 사전 예약제’라는 글자가 붙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나의 후배들은 더욱 편안하고 안전한 학교생활을 누릴 수 있겠지만, 나의 과거가 정말 먼 과거에 불과하다는 외로운 감상이 들기도 한다.


향기가 날아가는 것이 아까워 열어보지도 않은 향수는 이제 다른 냄새가 나고, 사계절을 함께한 앵두나무는 어느새 베어져 보이지 않는다. 노란 꽃구름이 풍성하던 산수유는 지고, 오밀조밀한 향기의 라일락이, 겹벚꽃이, 아카시아가, 장미가, 비비추가, 노란 코스모스가, 억새가, 모두 피었다가 사라진다.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은 단종되어 나오지 않고, 즐겨 하던 게임은 서비스 종료를, 자주 가던 음식점은 문을 닫는다.


추억은 항상 어렴풋하게 멀어진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벅차고 무섭다. 언젠가 내 주위의 모두가 나를 두고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이 항상 나를 짓누른다.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되새겨도, 그 사실 자체가 나는 외롭고 슬프다. 이미 지난 하루 십 분을 견디는 일도 이렇게나 힘든데, 세상은 훌쩍 계절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마냥 뒤처진 채로. 뒤처진 채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뒷모습만을 되새긴다.


변해야 다음이 온다. 산수유가 져야 라일락이 피고, 겹벚꽃이 져야 아카시아가 핀다. 장미가 져야 비비추가 피고, 노란 코스모스가 져야 억새가 고개를 숙인다. 알지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이대로 멈춰버리면 안 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싶다. 다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아질 것도 못나질 것도 없이 평생 이대로 있고 싶다. 늘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을 칼로 잘라내어 영원히 박제해버리고 싶다고. 부모님은 평생 늙지 않고, 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계절 좋은 오늘을 기분 좋은 오늘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생긴다면, 그런 확신만 생긴다면, 나는 더이상 외롭거나 무섭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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