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이 아니라고? 믿기지 않는다.
얼마 전, 정신의학과에 다녀왔다.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 의사가 말했다. 나는 우울증이 아닌 것 같단다. 약은 처방하지 않을 테니 더 힘들어서 못 견디겠을 때 오라고. 그러나 볼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도 안 돼. 그래도 의사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나는 순종적인 환자다. 챗지피티나 제미나이의 말보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믿어야 한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중하거나 아예 집중하지 못한 게 벌써 몇 년이 되었다. 물건을 자꾸 깜빡깜빡하고, 할 일도 놓치거나 실수하고.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던 건 십여 년 넘게 좋아하던 가수의 첫 내한 공연에 갔을 때,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일이다. 나는 내가 틀림없이 엉엉 울어버릴 줄 알았다. 아는 사람에게 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마스크에 목도리까지 꽁꽁 싸맨 것도 모자라 같이 가자는 친구까지 만류하고 혼자 다녀왔는데, 울기는커녕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그래서 부랴부랴 연가를 내고 다녀왔더니, 내 우울이 치료할 수준이 아니라고?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단 이유만으로 괜찮다고? 그럼 남들은 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지만 조금 슬프고 자주 불안하고 아주 가끔 행복한 상태로 두통과 무기력을 달고 살아간다고?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뇌가 흔들리는 이 감각이 아프지 않은 사람의 일반적이라고?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지지만, 사실 이번에 간 곳은 두 번째다. 첫 번째 병원의 의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무슨 신경계 수치는 정상 범주고, 원한다면야 우울증 약을 처방하겠지만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그래도 굳이 한다면 상담 치료 위주가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얕고 여린 살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납득해온 과오들이 설령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누군가 말해준들 고집 강한 내가 다시 인정할 리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꼬박꼬박 챙겨먹으면 이 두통도 불안도 이따금씩 엄습하는 무기력이나 게으름 따위를 해결해줄 수 있는 마법의 약이다! 나를 바꿔줄 수 있는, 인터넷 밈에서나 나올 법한 빨갛고 파란 약을 줬으면 좋겠다!
결과를 듣고 태연하게 나와서 한 오 분 울었나. 뒤이어 엄습하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나는 이 결과를 위해 피같은 연가를 두 번이나 써서 병원에 두 번이나 가고 병원비를 십만 원이나 허공에 날렸다. 차라리 먹고 싶었던 디저트나 먹으러 갈 걸!
인생은 삼세판이라지만 한 번 갈 때마다 삼만 원에서 오만 원은 우습게 깨지는 정신과에 또 갈 각오는 들지 않는다. 때로 예비 실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두 곳이나 갔는데 모두 유사한 결과라면 얼추 맞는 법이다. 와, 정말 다들 이러고 사나? 대단하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아주.
사실 주위에 있는 ‘진짜’ 우울증 환자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할 근거는 마땅히 없다.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약도, 의사의 시간도, 그리고 내 돈도. 그렇다면 어떻게든 사람 꼴을 하며 살아갈 수는 있는 내가 아니라 더 힘들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 나로서는 그런 곳이 아닌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돈을 쓰는 게 옳다. 대체로 우유부단한 나이지만, 상대가 나일 때만큼은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다. 아. 그럼 이제 나는 대체 누가 구해줄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