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by 믈름

비행기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가운데 자리. 불길함을 느끼기라도 한듯 떠나가라 울어대기 시작하는 갓난아이. 창밖으로 핏빛 노을이 깔리는 순간. 너른 구름바다 위로 모 영화사의 로고가 나타나고, 절호의 타이밍에 할리우드 대작 영화의 막이 오른다.


상상은 보통 거기서 끝이 난다. 비행기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농담의 영역이 아니고, 나는 보기보다 겁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서. 그냥 안전하고 조용하게 다녀올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옛날에는 조금 더 즐겁고 설레기만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렵기만 하다.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대체로 불안과 긴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구름을 뚫고 지나가는 찰나. 사방이 구름에 쌓인 그 순간만큼은 특이한 쾌감이 전신을 관통한다. 원론적으로 구름과 맞닿아 있는 것은 비행기의 딱딱한 기체고, 나에게는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쩐지 축축하고 푹신푹신한—시원하고 습하지 않은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 그 느낌이 좋다.


과거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후대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게 하늘을 누비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까? 고작 백여 년의 차이로 보지 못한 구름 위의 풍경이 원망스럽지는 않을까? 만약 그들이 하늘하늘한 천 자락처럼 흩어지고 퍼지는 저 구름을 직접 보게 된다면 기쁠까, 슬플까 혹은 만족할까.


당장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꿈을 꾸는 사람들은 참 멋있다. 그것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삶이란 얼마나 비참하고 찬란할지, 그 풍경이 나로서는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오르지 못할 산을 오르다 절벽으로 떨어져 부스러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감히 하늘을 날았을 때 받게 될 신의 천벌이 무섭지는 않았을까. 나와 너무 다른 그들은 혹시 추락마저 기꺼웠을까.


나는 무섭다. 얼마 쌓아 올리지도 못한 이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도, 그리 건강하지 않은 몸뚱이가 부서지는 것도 그리고 어쩌면 평생 하고 싶은 것 없이 무기질적으로 살아가게 될 나의 미래가.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언젠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계속 날이 춥다. 목구멍에서 뜨끔한 열이 나는 게 아무래도 편도선이 부은 모양이다. 아랫배도 살금살금 아프다. 추운 날씨에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위장을 쿡쿡 찌른다. 오늘따라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가. 마치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평소와 달리 긍정적이게 된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하지 않고서 배길 수 없는 일을 찾을 때까지,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지금의 나는 어쩌면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인 걸지도 모른다.


이성의 끈을 놓쳐버린 머리는 발칙한 망상을 계속한다. 내가 싫고 우습고 한심한 사람이라서, 나는 이 찰나의 긍정조차 비웃고 싶어 하지만 그래도 그 생각은 정말 네가 한 것이라고. 컨셉질이든 변명이든 네 머릿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꾀어낸 것이라고. 그러니 행복하지 않은 나를 억지로 단죄할 필요는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게 잘못은 아니니까, 행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당연하지만 어려운 결론에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고난을 면피의 용도로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아프지도 않은데 아파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들이 자해를 하듯이 무언가에 상처를 주는 행위에 중독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서 나 자신에게마저 자비 없는 나에게 도취 되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모든 순간이 영화로 제작된다면 그 관객은 평생 한 명일 것이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관에 영영 갇힌 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일대기를 꼼짝없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욕하거나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이상하다. 차라리 누군가 아주 가치 없는 영화라고 말해준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는 없는 거겠지.


어차피 그렇다면 조금은 대충 훑어보도록 하자. 보기 싫은 장면에서는 살짝 눈을 감고, 지루한 장면에서는 코도 골아보고, 가끔 좋은 장면에서는 소리 내어 울어도 보고.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테니까. 어차피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차피, 나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해도 괜찮다. 무엇을 해도 괜찮다. 그래. 괜찮다.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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