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들

by 믈름

몇 년 전인가. 경복궁에 갔을 때 한복 치마를 입은 한 무리의 남학생들을 보았다. 어떤 의도로 입었는지 나야 알 길이 없지만, 추억에 길이길이 남을 사진을 찍기 위해 예쁜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꽤나 새롭고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 즐거운 추억에는 남자 옷이고 여자 옷이고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예쁘기만 하면 됐지.


만원 버스에 어린아이의 손을 꼭 잡은 애 엄마가 올라탄 적이 있었다. 내가 타는 버스 노선은 언덕의 경사도가 심해서 덜컥덜컥 멈추거나 밀리는 일이 잦은데, 그 탓에 다 큰 어른들도 몸 가누기가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앉히더라. 날씨도 더운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아마 일이 잘 풀렸을 거다. 전화 문의를 끝내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했는데, 어쩐지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전화상담원이 긴 문자로 따뜻한 말씀 정말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내주셨다.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되셨을까?


크지 않은 돈이지만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단체가 있다. 답례로 보내오는 매거진을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탄이니 먼지니 온갖 더러운 것들을 묻힌 채 헤벌쭉 웃는 못난 사진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다가도 또 이런 일이 있다.


아침 출근길. 척 봐도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노부부가 탔다. 다행히 한 명이 자리를 양보해 주어 할아버지는 앉으셨지만, 할머니는 앉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버스 기사가 외쳤다. 앉으세요, 할머니. 일단 변명을 하자면 내 자리는 안쪽 깊은 곳의 창문가 자리였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 하나가 일어설 때까지 버스 안의 지독한 외면과 침묵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일어섰다. 저 자리라도 앉으시겠어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덧대지고 물러지다가도 깎이고 딱딱해진다. 착한 사람이 있는 만큼 나쁜 사람이 있다. 어쩌면 나쁜 사람이 더 많다. 항상 생각하지만, 역시 내 마음의 최종 형태는 예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곰팡이가 핀 것처럼 여기저기 얼룩져서는 최후의 순간에는 쓰레기 판정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그렇더라. 나는 따뜻하지 않은 이 세상이 너무 밉고 싫고 또 원망스럽지만, 가끔 아주 작은 온기에 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 작은 온기를 잘 간직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 꺼내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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