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 하지마라.
이것은 앞으로 직장 때려치고 타국에서 프리랜서 포토로 일하고싶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라는 해법이 담긴 글이 아니다.
그냥 내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한풀이를 하며 쓴 글 이상 이하도 아니며 오히려 왠만해서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 쓴 글이다.
나는 아직 한국에서 말하는 '성공'에 가까운 인생을 살고 있지 않고, 특히 프리랜서로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도 이정도까지 해내온 내 자신이 대견하고, 힘든길을 선택하면서도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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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랬고 쟤도 그랬고 님도 그럴 것이다.
특히 이 글을 굳이 선택해서 읽고 있다면,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고 있고 지금 취미로 하는 사진이 언젠가 늘고 인지도도 쌓여서 프리랜서로 밥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와중에 타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꿈꾸던 외국생활과 직장에서 자유로운 프리랜서 생활!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그랬었다.
수직적인 조직생활이 애초에 맞지도 않았고 반골 체질이라 직장생활은 정말 지옥같았고, 언젠가 프리랜서로 일하리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해서 이미 해외생활을 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개업한지 4개월 째 나는 어느정도 먹고사는데에는 지장 없을 정도로만 벌고 있다. 아직 비수기(남아공은 6-9월이 겨울이라 이 시기에 행사, 결혼식 등등이 굉장히 적다)라 더 힘든시기지만 이 시기에 이정도까지 버는걸 보면 왠만한 다른 현지인인 포토그래퍼들보다 더 잘하고 있다.
나는 예고 동양화과->미대 영상영화과 테크트리를 탄 성골 예술충이다.
예술충인 그 와중에 집안은 다이아몬드/금수저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휴학도 하고 휴학하는 도중에 일도 많이 했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나는 조직생활을 못할 팔자라는 것을.
어릴때부터 반골성질이 강했다.
주위 어른들이 여자애는 이래야지, 어른이 말하면 들어야지 하면 아니제가왜요? 하고 항상 되물었고, 네 하고 넘어갈수가 없는 아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나마 사회생활로 쳐내긴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달라지진 않았다.
어디라고 말은 못하지만 역대 일했던 직장중에 하나는 내 몸에 있는 타투(물론 일할때는 가리고 다녔지만 그냥 타투가 있고 그와중에 더 했다는게 맘에 안들었나보다)와 그냥 보통의 한국인처럼 지내고/생활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등으로 짤리기까지 했다. - 정말 내가 일을 못해서 짤렸으면 억울하지라도 않다.
나는 근데 그 와중에 또 굉장히 외향적이고 새로운 환경을 좋아하며, 불편할 수도 있는 그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을 하는 성향을 가졌다.
전부터 유행이 돌던 MBTI로 설명하면 ENFP이다. 실제로도 결과가 항상 ENFP로 나온다.
다들 탈조선 탈조선 하지만 실제로 그 '탈조선'이 성향과 맞는 사람은 아주 많지 않다.
오히려 아주 적다.
여행의 좋은 점만 보고 외국생활을 동경하는데, 외국생활을 하려면 일단 자기의 comfort-zone을 떠나야 이루어진다.
오래 보고 지내던 가족, 친구, 동네를 다 뒤로 하고 오래 못 볼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향수병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특히 이 나라에 혼자 왔고, 결혼 이민도 아니며, 정말 홀홀단신으로 왔다.
나는 희안하게 향수병을 좀처럼 앓지 않는다. 나는 23살 때 1년간 인도에서 지냈고, 지금도 1년동안 남아공에서 지내고 있는데 가족이랑 친구가 보고싶지는 않다. 보고싶지 않다는 말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물론 만나면 반갑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떠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인 나는 그냥 가족과 친구들을 마음 한 켠에 저장해놓는다. 말로 표현하려니 어려운데, 여튼 무작정 그리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친구를 아주 쉽게 만드는 편인데, 그래서 외롭다는 감정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친구 만들기는 외국생활에서 아주 중요한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새롭고 낯선 타지에서 인간관계를 구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내향적인 사람은 외국생활을 조금 힘들어하는 걸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인도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멕시코에서도 오자마자 친구를 많이 만들었고 내 입지를 다져놓았다.
특히 나는 남아공은 오자마자 난 이 곳에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내가 사는 이 지역을 어느정도 제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1년이 지난 지금 지역 또래 집단은 나를 아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 와중에 틱톡도 팔로워가 제법 늘어 이제는 모르는 사람도 나를 알아본다.
친구가 항상 나에게 하던 말이 있다.
나는 실행력이 거의 불도저 급이라고.
뭐 하나를 해야 하겠다 하면 정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도 그냥 해버린다.
대학생 때 졸업작품을 해야 했는데, 정말 영화를 너무 찍기 싫어 해외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탔다. 말이 쉽지 개고생했다.
실행력 때문인가, 위기가 닥쳐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냥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일단 침착해진다. 워낙 이상하고 다양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정말 멘탈붕괴가 잘 되지 않는다.
이 것들은 특히 프리랜서로 타국에서 살아남을 때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쉬운일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해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뭔가 해야하는 일이 생기면 그냥 밀어부처 일한다. 그리고 위기가 생기면 아무도 나대신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단 내가 무너지면 다 ㅈ되는 것이다.
그래서 침착함이 아주 중요하다. 나도 계속 되내인다. "내가 무너지면 다 ㅈ된다."
장점만 잘 포장해서 써봤지만 물론 나는 단점이 오지게 많은 사람이다. 불도저같은 실행력을 가졌지만 용두사미가 된 적도 많고, ADHD까지 앓고 있어서 집중력도 짧으며, 때로는 사회에 순응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
그래도 그와중에 좋은점은 무기로 삼고 행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지는 것 같다.
물론 사진도 예술의 종류 중 하나라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잘찍고 못찍고는 정말 주관적이다.
하지만 일단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진이어야 한다. (당연함)
취미로 사진하면서 주변에서 야 너 사진 잘찍는다! 하는 것과 다르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인지도가 높으면 페이도 달라지고, 그 인지도는 정말 좋은 사진이어야 늘 수 밖에 없다.
사업적 수완이 좋아서 주변에 인맥을 잘 꾸려놔도 사진이 구리면 결국 예약을 받을 수 없다.
사진은 특히나 경쟁이 쎄다.
취미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수천수만명이고,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사진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여기 남아공도 웨딩 포토그래퍼를 구하는 페북 글에 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다.
다들 업체들이다.
남아공의 경우는 특히 가격에 대한 문제가 큰데,
새로 사진을 시작하는 포토그래퍼들이 자신의 가격을 후려 쳐 생기는 문제다.
두시간에 겨우 3만원도 안 되는 가격을 받는다고 하는데 좋은 사진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고객이라면 그냥 싼 업체를 택한다. 물론 이건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가격을 후려치지는 말자.
아무리 그렇다지만 사진을 잘 찍는다면 당연히 예약이 들어온다.
정말 그래서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살고있는(혹은 살고 싶은)나라에 대한 시장조사가 필요하다.
어떤것이 잘 팔리고 어떤 포토 업체가 잘 되며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니즈를 보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밑에서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나는 남아공에 원래 취업이 되서 왔었고 여러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나라가 너무 좋아서 남게 된 케이스다. 하지만 밥벌이를 해야했기 때문에 다시 카메라를 잡게 되었다.
위에서도 간략하게 말했듯이 나는 원래 사진을 했었고, 간간히 외주받아서 상업사진도 했었다. 남아공에서 회사에서 일 할 때는 겸임 금지 조항 때문에 그냥 취미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장 먹고살 방법이 사진밖에 없어 하게 되었다.
흔히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하는 나라들의 특징은 외국인을 기업에서 '왠만해서' 안뽑는다.
여기가 영국이거나 미국같은 나라였다면 적어도 나는 알바라도 하면서 천천히 사진을 직업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공은???
생각해보자. 남아공은 외국인이 남아공 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워킹 비자를 잘 내주지 않는다. 이조차 힘든데 남아공의 인건비는 한국보다 훨씬 싸다.
그럼 남아공 기업에서는 굳이 남아공사람보다 인건비도 비싸고 워킹비자가 나올지 안나올지도 모르는 외국인인 한국인을 굳이 고용해 쓸 이유가 없다. 내가 정말 너무 뛰어나지 않는 이상. 근데 남아공이랑 한국 두 나라가 인구가 비슷한데 당연히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 나라에도 많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카메라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단 이 나라의 생태, 특히 사진 생태에 대해 연구해보기로 했다.
내가 뛰어들 업계에 대한 조사다.
남아공은 일단 다민족 국가다. 그래서 웨딩으로 예를 들자면 흑인 커플은 흑인 포토그래퍼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고, 백인 커플은 백인 포토그래퍼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아시안이고 남아공의 아시안 인구는 아주 적다.
그래서 나는 이걸 전략적으로 나는 모든 인종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포장했다.
아무 그룹에도 못 끼니까 아무 그룹에도 낄 수 있게 만들었다.
샘플 사진을 찍을 때도 일부로라도 모든 형태의 커플(아시안-백인커플, 레즈비언 커플, 게이 커플, 흑인 커플, 백인 커플)을 데리고와 샘플을 찍었고, 브라이덜 촬영 같은 경우에도 남아공의 대표적인 인종들인 흑인, 백인, 컬러드, 인디안 모든 모델을 데려다가 찍었다.
그리고 여기 포토그래퍼들은 이상하게 프로의 세계여도 풀프레임 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
70D도 많이 봤고 소니 a6500도 많이 봤다.
그래서 이미 풀프레임 카메라를 갖고 있는 나는 중간은 가는 거였다.
물론 고객들은 풀프레임이던 크롭 센서던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면 알 것이다.
한국은 여름이 오지게 덥고 겨울이 오지게 추운 나라라서 실내 냉방/난방이 잘 되어있다.
그래서 결혼식이 365일 다 열린다. 물론 5월같은 특수한 달 빼면.
대신 남아공은 겨울(5월부터 9월정도까지)에 결혼식을 잘 안한다. 행사도 잘 열지 않는다.
심각한 비수기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웨딩 포토그래퍼들이 여름(11월-3월)에 바짝 벌고 비수기에는 쉰다.
그리고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웨딩, 이벤트, 제품인데,
그 외에 매거진 사진같은 경우에는 매거진이 돈을 아주아주아주 적게 준다고 한다. (다른 동료 포토그래퍼들에게 들었다) 대신 매거진은 자기 업체 홍보 광고를 매거진에 싵게 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딜을 걸 수 있다.
이벤트도 종류가 다양하다.
이 부분은 밑에서 설명하겠다.
법적인 부분도 해결을 해야 했다.
포르투갈 같은 경우에는 최근에 프리랜서 비자라는 것이 생겨서 합법적으로 바로 할 수 있는데 나는 다른 수를 써야 했다.
일단 내 비자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20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법적으로 사업자등록을 할 수 없다.
물론 작은 이벤트(일주일에 한두번 있고 페이가 한번에 50만원이 넘지 않는 페스티벌이나 공연) 같은 경우에는 그냥 일주일에 20시간이 넘지 않는 선에서 다이렉트로 나를 고용할 수 있지만(파트타임 형태로), 웨딩이나 큰 기업의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인보이스가 필요하거나 해서 내가 혼자 할 수가 없다.
이부분은 어쩔 수 없이 곧 남편이 될 남자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남자친구는 이미 프리랜서고 남자친구 이름으로 자기 사업체랑 포토그래피 스튜디오를 묶은 미디어 회사를 등록하고 사업자 통장도 만들었다. 나는 실질적으로 남자친구 회사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인보이스같은 것이 다 남자친구 이름으로 나가게 된다.
물론 현금으로 받거나 다른 방식을 쓸 수 있고 법의 망을 피해가더라도 아무도 신고하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나는 합법적인 방식을 고집했다.
아무리 내가 반골이고 뭐고 일단 법 앞에서는 당당해야지.
나는 이 일을 3월부터 시작했다.
근데 3월은 이미 겨울의 초입이라 결혼식이 많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결혼식 샘플 사진도 없던 나에게 당장 인생일대의 이벤트인 자신의 결혼식을 손수 맡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이벤트를 공략해보기로 했다.
마침 3월 말에 일렉 베이스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고 사진이랑 관계없이 원래 가기로 했던 행사라 이미 티켓은 구매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일단 시도를 해 보았다. 주최측에 연락을 넣어 혹시 포토그래퍼를 더 구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고 대답은 역시나 이미 포토는 구했다고 답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 관계없이 사진을 조금 찍어서 보내준다면 다음 번 이벤트에 고용을 해 주겠다고 했다.
일단 뭐라도 해 봐야 해서 페스티벌에 카메라를 들고 가 몇 컷 찍어봤다.
사진을 전달한 후 며칠 뒤 페스티벌을 주최한 회사의 대표가 직접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앞으로 자기가 주최하는 모든 공연과 페스티벌에서 일할 수 없냐고 했다.
나는 너무 믿을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는 이 주의 일렉계 공연의 큰손이다.
당연히 알겠다고 했다.
이런 일들이 종종 생기게 되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구한다는 내 인스타그램 글에 같은 지역에 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연락을 했고, 그 사람과 다른 웨딩드레스 부띠끄 샵이랑 같이 콜라보레이션으로 브라이덜 촬영을 진행했다.
드디어 나도 웨딩 관련된 포트폴리오가 생긴 것이다.
그 이후에 웨딩도 예약이 들어왔다.
나는 일단 광고에도 힘을 썼는데, 페이스북 페이지도 만들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파고 한국어 블로그와 웹사이트도 만들었다.
웹사이트는 웹 디벨로퍼로 간간히 일하는 남자친구가 만들어 줬다.
한국어 블로그는 혹시나 한국-남아공 국제커플이 보지 않을까 해서 만들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틱톡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관종이라 그냥 남아공 사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느낀 점을 썰풀듯이 찍어서 올렸는데 꽤나 반응이 좋아서 벌써 구독자가 5만명을 넘어섰다.
구독자가 조금 생기던 시점에 광고 영상을 올렸는데 거기에서도 예약이 들어왔다.
인스타그램은 원래 쓰던 계정에서 계속 홍보를 하며 새 업체 계정을 태그했는데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온 케이스도 많았다.
그리고 행사(공연이나 페스티벌)에서 계속 일하다보니 행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팔로우를 걸었고 그 사람들이 나를 예약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결국은 인맥이다.
나는 만 27세다.
근데 이 나라에 산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외향적이어도 나의 1년의 인맥과 여기서 27년 내내 산 내 동갑내가 다른 남아공인의 인맥은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매달렸다.
지역 커뮤니티 페이스북 그룹 죄다 가입하고, 행사 나가고, 광고 만들고...
틱톡도 정말 열심히 한다.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이벤트 하면 올려달라고 하고 몇 친구들 찍어주면 친구들이 내가 찍어준 자기 사진 올리기도 하고.
다른 동료 포토그래퍼들과 친해져서 그사람들이 아프거나 할 때 품앗이 하고.
아직도 진행중이다.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아직도 정말 부딫쳐서 해결보는 중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약 아직도 남아공에서 다녔던 회사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면?
물론 그 당시에 나는 또래에 비해 돈을 꽤나 많이 벌었고 부촌에 위치한 방 3개딸린 집에 혼자 살았으며, 매일 비싼 음식을 먹고 돈걱정 없이 지냈다.
하지만 회사생활은 지옥같았고 내가 정말 하고싶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그때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 외식도 매일 못하고 야식 땡긴다고 편의점에서 6만원씩 꼴아박는 미친짓은 더이상 하지 못한다.
하지만 행복한 것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 아직 부족하지만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고 나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있다는 뿌듯함이 정말 크다.
하고싶은거 다 하고 살고 싶다. 나는 앨범도 만들거고 그림도 그릴거고 틱톡도 계속 할거고 음악도 하고싶다.
그렇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
약속된 월급이 없다는 것은 사실 정말 힘든 일이다.
내 월급은 내 역량에 따라 좌우된다.
특히 위에 모든 것을 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해야한다.
나는 영어가 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65일 24시간 모든 인간관계와 비즈니스를 영어로 하는것이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남아공은 물가가 싸서 생활비는 많이 들지 않아서 좋지만 그 뜻은 내 임금도 적다는 얘기다.
그리고 해외생활이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와중에 한국에서도 힘든 사업체 차리기를 외국에서 외국어로 다 해 내야 한다. 말이 쉽지 나도 아주 가끔은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가고싶기도 한다.
하지만 곧 남편이 될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내가 과연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생활을 다시 한다고 해도 과연 행복할까? 생각을 하면 참아진다.
그래서 쉽게 이 길을 택하라는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걸 하겠다면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