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행동 안에 겹쳐 있던 마음들
우리의 내면에서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는 종종 하나의 행동으로 단순화되어 나타납니다. 걱정, 놀람, 분함, 미안함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섞여 있음에도, 겉으로는 짧은 말 한마디나 무뚝뚝한 표정, 혹은 날카로운 행동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수많은 색과 선이 한 화면 안에 겹쳐져 있다가, 결국 몇 개의 형태만 남기고 표현되는 '추상화'와 닮아 있습니다. 감정의 세부는 생략된 채, 가장 강한 윤곽만 남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나서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겹쳐 있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아침. 아내와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코너를 도는 길, 아내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저는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멈춰 섰고, 아내도 당연히 멈출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핸드폰에 집중한 채, 늘 걷던 방식 그대로 코너를 향해 나아가려 했습니다. 순간 위험을 감지한 저는 행동으로 아내를 잡는 건 늦었기에, 급히 말로 위험을 알렸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후 아내에게 한 저의 말투였습니다. 위험을 알리고 핸드폰을 보며 걷지 말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었는데, 아내가 듣기에는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예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말에 아내의 표정은 굳어졌고, 차가운 날씨는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차에 탄 뒤에도 아내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목적지에 다가오자 아내는 억울함과 분함이 섞인 말들을 꺼내는 중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오늘 하루를 응원하고 헤어졌을 그 시간에, 아내는 자신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남긴 채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1분도 되지 않아 깊은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문제의 순간에,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다만 했더라면 아내의 감정과 이 차가운 공기는 이렇게까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이렇게 모난 마음이 툭툭 튀어나오는 제 감정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상황은 단순히 '위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째 이어진 고통스러운 허리 통증으로 이미 제 마음은 모나 있었고, 그 상태가 "위험 상황"과 만나 그 상황에 맞지 않는 말과 말투가 나온 것은 아닐까요. 오늘의 감정과 행동, 말투는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 여러 낯선 감정들이 겹쳐 만들어낸, 아직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감정의 결과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화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낯선 감정들 말입니다.
만약 그 감정이 하나의 감정이었다면, 위험함을 인지하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 전달하는 말과 행동으로 상황은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다른 감정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몸이 아픈 스트레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제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회식자리, 내일의 스케줄, 오늘 꼭 끝내야 하는 일들까지. 그 아침의 저는 사실 한두 개의 감정을 안고 있던 것이 아니라, 꽤 많은 감정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이 아침 사건과 부딪히며, 상황에 맞지 않는 말과 말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감정들이 섞여 낯선 저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낯선 감정들은 아직 충분히 감정의 가지를 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확실히 분화되지 못한 채 덩어리 안에서 얽히고설켜 있는 감정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장하며 제가 외면하려 했던, 감정의 줄기들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내면에서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지만, 그것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종종 하나의 행동으로 압축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 앞서거나, 행동이 먼저 튀어나온 뒤에야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합니다. 감정이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상태라면, 행동이 감정을 대신해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은 언제, 어떤 경험을 통해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될까요. 감정은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감정을 말로 꺼내 보려는 시도 속에서 조금씩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비슷하다고 느꼈던 불편함이 서운함이 되고, 분노와 섞여 있던 감정이 사실은 두려움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감정은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그렇게 경험되고, 되짚어지고, 언어로 불려질 때 감정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벗어나 이름을 얻고, 우리는 그 감정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조금씩 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