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내 삶이 가치가 없는 건가 (24.01.26)
오랜만에 친한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유는 같이 사용하고 있는 넷플릭스를
24년도에서 할 건지 물어보려고.
그러면서 안부 이야기를 하다가
대형기획사에 트레이너로 나가고 있는 언니기에
최근 회사에서 괜찮은 트레이너가 없냐고
컨텍이 왔는데 내가 생각이 났다면서
지방으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더라면
다시 같이 일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언니는 지금 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형기획사 2곳과 중형기획사 몇 군데서
트레이너를 하고 있다.
나는 몇 년 전 언니의 추천으로
중형기획사에서 1년 정도 트레이너로 일했다.
마지막에는 언니와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
언니랑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스케줄만 괜찮으면 같이 일하러 가고
마치면 같이 집에 오기도 했다.
그 시절 힘들었지만 참 좋은 추억이었다.
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 말 없이 집안일만 했다.
내가 서울에서 몇 년만 버텼으면
대형기획사 트레이너가 됐을 수도 있었나
지방으로 이사오기로 하고
다른 회사에서도 인터뷰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중대형급 회사도 추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의 커리어가 훨씬 다양하고 힘이 세질 수 있었는데..
라는 아쉬움들?
나는 본가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왔다.
음악만 하던 나는
음악을 하면서 엄마의 권유로 간신히 따놓았던
복지사자격증이 있었기에
남편과 함께 엄마가 운영하시는 작은 센터에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사람일 참 모르는 거다.
사실 지방으로 내려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날 늘 고향으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성인이 돼서는 살아보지도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 때야 잠시 왔다갔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늘 막연하게
언젠가 돌아가서 살고 싶어~ 했는데
그 당시 갈 수 있는 모든 여권이 만들어졌다.
그때 엄마가 운영하는 센터에 일손이 부족했고
(티오가 없으니 3년 뒤쯤 오는 게 어떻니라고 막연하게 이야기만 했었던 상황이었다)
남편이 다니던 직장이 어려워져서 직원들 중 몇몇은 그만둬야 하는 불안한 상황이었고
나도 다니던 기획사에서 내가 가르치던 연습생들이
경쟁에서 밀리고 방출되어 자연스레 나도 정리가 돼서
동네 실용음악학원 2군데에서 몇 안 되는
레슨생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우리 사는 지역은 전세가 정말 없는데
마침 괜찮은 가격에 30평대 신형빌라가 나왔기에
다른 사람이 계약하기 전에 계약을 했다.
(참고로 계약서를 쓰고 있을 때 그전에
보고 간 사람이 전화 와서 자기가 계약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이렇게 딱딱 상황이 열렸고 지방으로 왔다.
도시에서는 직장과 집의 거리가 가까워
대중교통을 타고 우리는 일하러 갔었는데
지방으로 오니 차가 무조건 필요해
차도 사고, 십몇 평에 살다가 방 3개, 화장실 2개인
30평대로 이사도 오고
그냥 감사한 것이 많았다.
이사 오고 1년 정도는 나는 임신을 준비했고
일을 하지 않아 도시에서보단 돈을 못 벌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았다.
우리 시부모님들 장로교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에 권사고 안수집사며, 남편은 태어나서부터 대형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했고
나 또한 스무 살 때부터 그 교회에 출석하며 봉사했고
다른 침례교에서 가작 큰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
이제는 엄마가 하시는
성도 30명도 안 되는 개척교회에 나가고 있다.
이상하게 우리가 온 시기부터 교회에 어려운 일들이
생겨 목사님인 엄마가 믿었던 성도들에게 상처받고
응급실에 실려가고 참 많은 일들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방으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는 참 외롭고 힘들었겠다
아무리 목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보호를 받는 목사라 할지라도
참 외롭고 힘들었겠다 싶어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센터.. 우리의 일터 때문이 아니라
엄마의 사역을 함께하라는 사명을 주셨구나 싶었다.
오늘같이 전화를 받게 되면
마음이 무겁고 불편할 때가 있다.
같은 일을 했던. 잘 나가는 지인들의 소식
초반에는 ’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오기와 질투.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잘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거지
나는 저 사람만큼 못한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나라고 왜 안 누리고 싶겠냐만은
꼭 좋은 회사, 인정받는 삶
돈 잘 벌고, 외제차 타고 하는 것만
가치 있는 삶이 아니지 않을까
직원이라곤 가족이 전부고
화려한 곳이 아닌
외롭고 늙은 어르신들을 모시는 일을 하는 것도.
월급도 적고, 내 집 장만을 못해도
인원이 30명도 안 되는 작은 월세 교회를 섬기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 않나 싶다.
나는 상상력이 뛰어난 감수성쟁이다.
NF가 명확하다. 사실 정말 싫다.
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대부분은 염려가 불안이다.
그래서 싫을 때가 참 많다. 그런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우리 부부가 돈을 벌 수 있고
가족이 운영하여 많은 부담이 있지만
그만큼의 배려와 매리트가 있다.
센터가 망하면 어쩌지라는 상상으로 불안함을 느끼는데 그건 센터 망하고 생각하면 되고
내 삶을 돌아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더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었기에 거짓에 속지 말자.
돈 쓰는 법을 잘 모르는 우리 부부는
적은 돈을 벌어도 150만원 이상은 저축하고 있으니
단 10만 원도 저금 못했던 날들을 기억해라.
자꾸 돈돈하기 싫지만
사회복지는 참 돈이 안된다.
늙고 아프고 외로운 노인들을 돌보며
삶의 마지막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또한 나는 엄마아빠에게 어떠한 자식 일까도
고민하게 된다.
어르신들을 돌보다 보면
많은 효자들도 보게 되지만
온갖 불효자들을 보게도 된다.
참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하여튼 음악을 전공한 우리 부부가
그다음으로 얻게 된 직장이 사회복지라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돈은 안돼도
그만큼의 가치 있고 보람되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교회사역은
무뚝뚝하고 거친 우리 아빠가
사모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우리 부부가 피피티, 반주, 찬양인도, 아동부교사
여러 가지를 맡고 있고
나는 성도들을 더 잘 챙기려 노력하고
엄마가 되도록 사역에만 집중할 수 있게
여러 잡다한 일을 하려 노력 중이다.
나는 엄마의 자녀인데 사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남편한테 미안할 때가 참 많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에..
헷갈릴 때도 많았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건가
그저 엄마를 돕는 건가?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누군가 그랬다.
가족사역에는 큰 축복이 있다.
주의 종의 축복을 함께 받으니
원하던 원치 않던 내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자.
(이러면서 엄마 조기은퇴만을 바라고 있다.)
하여튼 오늘의 일기는
넷플릭스 결제할 거냐는
친한 언니의 전화를 시작으로
내 삶의 가치와 사명에 끝이 났다.
상상력을 동원한 좌절과 불안
온갖 구질구질한 미련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게
내가 지방으로 내려온 몇 년간 성장이란 걸 했구나 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