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햇볕, 벌레 울음소리, 왕릉 꼭대기 젖은 풀의 감촉, 여름 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2시간 반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한 남자의 하루를 좇는다. 중국북경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최현은 친한 형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는다. 문득 그와 함께 떠났던 경주 여행에서 본 춘화를 다시 보고싶다고 생각한 그는 홀로 경주로 떠난다. 7년 전 그 찻집은 다른 사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춘화를 찾아 들어간 찻집에서 윤희를 만나게 된다. 경주에서의 하루는 길었다. 과거 애인인 여정을 경주로 불러 이야기를 하고자 했으나 그녀는 피하듯 서울로 떠나버리고 최현은 찻집 아리솔에서 처음 만난 윤희와 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곤 경주 계모임에 우연히 나가 보기도 하고, 왕릉 꼭대기에 올라가 누워 보기도 하고,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들을 겪는다. 윤희는 사실 자살로 남편을 잃었다. 그날 밤 윤희는 최현을 집으로 불러들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서로를 그저 둔다. 꿈과 같던 밤을 뒤로 한 낮은 다시 밝아오고, 최현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상당히 긴 호흡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가 최현의 꿈이고 현실인지 주인공도, 관객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절제되어 가늠하기 힘든 최현의 감정선, BGM없이 조용한 대사로만 채워지는 음향. 어찌 보면 지루할 수 있으나 그 사소한 것들이 몰입을 만들어낸다. 확실한 것은, 이 영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것. 이 영화의 배경이 경주가 되고 있음이 이를 잘 보여준다. 경주는 어떤 도시인가? 지금은 죽어 사라진 신라의 뿌리가 있던 곳, 아파트 바로 앞에 지금은 죽어 사라진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 그리고 죽어 사라진 최현의 선배, 여정의 아기, 윤희의 남편, 점집의 할아버지, 폭주족들, 자살한 엄마와 노란 원피스의 아이가 있던 곳. 지금 죽은 그들도 결국에는 과거, 혹은 환상에서 붉은 입술로 숨을 뱉는 생명이었으며, 경주는 그러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공간으로써 존재한다. 이 죽음들의 향연 속에서, 혹은 최현의 환상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는 지나치게 덤덤하다. 아리솔 정원의 눈부시게 푸른 풀잎들만이 그 생명들을 담고 또 기억하고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