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
우리는 대용품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명품을 대신하기 위해 짝퉁이 있고, 각종 귀찮은 과정을 수반하는 섹스를 대신하기 위해 섹스 토이가 있다. 비단 물건들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사람마저 대용품이 된다. 정규직을 대신하기 위해 비정규직이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대용품들 덕분에 세상이 완성되고 촘촘하게 메워진다는 사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은 섹스의 대용품, 섹스 토이를 이용하여 이를 이야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공기인형은 생일도 없고, 이름도 없고, 심지어 장기도 없다. 밤에는 자신의 주인인 중년 남자를 상대하고, 낮이 밝으면 비밀리에 밖으로 나와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던 중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던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에게 자신이 인형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녀 눈에 비친 인간은 하나같이 외롭고, 소외되고, 치졸하고, 약은 모습들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만들어 준 창조자를 찾아갔을 때 분명 세상에 아름다운 게 없다고는 하지 않지만, 마음을 가졌다는 것에 아주 기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으면 소각용 쓰레기가 될 인간이 되기보다는 어쩌면, 재활용 쓰레기가 되는 공기인형이 나았으리라.
“ 생명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공간은 다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아마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총합. ” 만약 공기인형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이 이런 생명의 정의에 충실했다면 아마 공기인형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인간 사이 관계의 단절이 만들어낸 기이한 종류의 성적 대상물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공기인형. 자신은 대용품일 뿐이라며 주인에게 따지는 공기인형에게 주인은 “다시 인형으로 돌아 와주면 안 될까, 이러는 게 귀찮아서 너를 산거야!”라는 말을 한다, 그놈의 ‘귀차니즘’에서 오는 현대 사회 소통의 단절은 기괴한 문화까지 만들어 냈다. 욕구 충족은 해야겠고, 사랑은 하고 싶고, 사람과의 만남은 힘들고 귀찮고. 어딘가 <Her>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했다. 언제 내 속을 앗아갈지 모를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내 자신을 채워넣는 일은 어렵다. 차라리 인간이 공기인형처럼 내 숨을 타인의 몸에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존재라면 내 안을 채우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