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쳐다봤다. 마음에 행복한 기운이 솟았다. 궂은 날씨 때문에 전전긍긍하기를 일주일. 13호 태풍 링링이 거센 바람으로 벼를 쓰러뜨렸다. 곧이어 시작된 가을장마가 벼를 물에 잠기게 했다. 추수를 앞둔 농부의 마음은 더없이 어지러웠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임을 알기에 대놓고 원망할 수도 없다.
논을 갈고, 모를 심고, 물을 대면서 마음 졸이기 얼마인가. 수확이 줄어 돈을 못 버는 건 둘째 일이다. 그동안 수없이 논을 거닐며 말을 걸었던 벼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바람에 맞춰 춤을 추며 위로해주던 녀석들이다. 그런 벼가 맥없이 논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비바람이 불 때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고 애썼을 모습을 상상하면 더 그렇다.
하루가 참 길었다. 파란 하늘을 기다릴수록 먹구름은 더 짙게 느껴졌다. 가장 나를 괴롭힌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비 오기 전 논 물꼬를 다 낮춰 비가 빠지게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인가. 어느덧 나이 마흔이 지나고, 인생 2부를 시작하면서 인생의 절정기라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직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
요즘 태풍같이 느껴지는 게 하나 더 있다. 타인의 마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그의 생각, 하지만 여전히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그 존재감. 공감도 분리도 안 되는 진퇴양란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무력감. ‘이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태풍의 속삭임이었다. 그래, 사는 게 그런 거라면, 너무 애쓰지 말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미움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