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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ieum Jan 28. 2022

09. 괜히 남들까지 불편하게 하는 못생긴 페미니스트들

뚱뚱하고 못생긴 페미니스트들, 괜히 남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비건들



 어느 날 내 방에 있다가 문득 거실에서 들려오던 TV 드라마 소리. 어떤 여성이 또박또박 소리를 지르며 꽤나 시끄럽게 무언가에 항의하고 따지고 있는 상황인 듯 했다. 듣고 싶어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귀에 때려 박히는 바람에 들린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았다.

 "아니, 지금 분.명.히. 제 엉덩이 만.지.셨.잖.아.요!"

 "네? 아..아니 저는 그냥 제 핸드폰 꺼낸건.."

 "참 나! 됐고요. 이거, 명백히! 성폭력입니다. 경찰서 가시죠!"

 "네?? 아니라니까요.."

 누가 들어도 억울하게 연출된 상황, 이 상황 속에서 성희롱이라 주장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평범하지 않은 톤으로 고양돼 있었고 남성의 목소리는 너무도 '순수한' 억울함을 표하는 목소리였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거실로 나가 TV 화면을 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머릿속에 그려졌던 모습 그대로다.      


▲ 좌 - 윤서인 만화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모습. / 우 - 페이스북의 한 게시글에 올라온 페미니스트의 모습


 시사 만화가 윤서인의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모습과, 각종 혐오로 점철된 남초 사이트에서 등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모습은 비슷하다.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며, 남들 다 고개 끄덕이며 적응하고 사는 당연한 일에 유난 떠는 여성의 모습. 심지어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추하고 뚱뚱하게 그려진다. 즉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누릴 것들을 누리지 못해서 성평등을 외치기 시작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서프러제트를 '못생기고 남자한테 사랑받지 못해서 참정권 달라고 징징거리는 년들'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포스터.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서프러제트) 운동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 때에도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 운동가들은 '못생기고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조롱이 넘쳐나는 사회라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

 또한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S.P.E.W(집요정 해방 운동)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는 헤르미온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원래 그런 생물'인 집요정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유를 줘야 한다며 훼방을 놓고, '원래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헛된 분노를 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집요정들의 노동권과 기본 인권을 찾아줘야 한다는 헤르미온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어이없어하며, 집요정들도 모욕을 느꼈다는 듯 반응한다. 

 게다가 동물권 운동가들은 더 고충을 겪는다. '동물 먹지 말라고 반대하면서 동물가죽 옷 입는 사람들', '개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서 소고기는 먹는 사람들', '뒤에서 몰래 동물가죽 고급가방 메는 사람들' 정도로 희화화되는게 현실이다. 매번 비건 관련 뉴스 게시글에는 "동물은 불쌍하고 식물은 안 불쌍해요?ㅋㅋ" 따위의 반응이 달린다. 사실 생각해보면 본인이 비건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굳이 그렇게 비건 실천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도 없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보는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니까'. 

 소설, 드라마 등 꼭 이런 프레임을 씌운 <저항하는 캐릭터>는 꼭 주변에서 어이없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필요 이상 과잉된 목소리와 행동 표현을 동반한다.  왜 많은 콘텐츠와 미디어들은 페미니스트, 동물권 운동가(비건) 등을 포함하여 각종 운동가들을 꼭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가? 이 심리의 기저에는 '남들 다 그냥 그렇게 살고 고개 끄덕이는데, 쟤네만 유난떨고, 예민해한다는 것'이 핵심적으로 깔려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본인들이 편하다면 안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불편함, 부당함을 느낀 구성원들은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사회에서 불편함과 부당함을 느끼기 쉬운 구성원은 기득권이 아닌 약자층이다. 사회는 이러한 약자층을 비웃는 방식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고수한다.

 게다가 당사자성이 없는 그룹이 (ex. 남성 페미니스트, 비건) 인권운동을 말하면 더더욱 비웃는다. 나와 같은 인간인 주제에, 윤리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한 사회가 그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듦으로써 기존의 체제와 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향성에 있어서 매우 해롭다. 

 누군가 '옳은 것을 하자'고 주장하며 현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비판했을 때 만약 그에 동의하지 않거나 실천하기 싫으면 그냥 실천하지 않으면 되는데(사실 그것도 굉장히 유연하지 못한 사고방식임을 시사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이란 매우 간사하고 감정적이기에 꼭 함께 수준을 끌어내리려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인권 운동가들을 비웃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당신이 만약 어떤 저항의 메시지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거기에서 끝내길 바란다.

 "뭐? 내가 기득권이라고?, 내가 누군가를 착취하며 산거라고? 이게 조롱이라고?"

 더 생각해보기 싫을 수도 있고,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거기에서 끝내면 된다.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해오던 것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면, 그냥 인정하지 마라.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그 저항가들을 조롱하는 것까지 나아가지는 말아야 한다. 

 예컨대 지금까지 써오던 말이나, 해오던 행동들이 여성혐오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당신은 여전히 하고 싶다면, 그냥 고치지 말고 살든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한 페미니스트들을 조롱하는 것은, 그건 더 추해지는 짓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당신이 먹는 고기에 대해 "그건 동물의 사체에요." 라는 말을 했는데, 이를 듣고도 앞으로도 먹고 싶다면 그냥 지금까지처럼 고기를 먹어라. 하지만 비건들을 조롱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동안 인류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 온 진실을 일부러 말해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조롱하는 저열함까지는 가지 말라. 

 

 사회는, 저항하는 사람들이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할 것이다. 당신이 그 버스에 함께 올라 탈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냥 타지 말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어라.  그들을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본인의 마음 하나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인류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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