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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ieum Feb 17. 2022

13. 생리의 대체어, 정혈?

'생리'를 더 페미니즘적으로 일컫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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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을 가리켜 '사상', '가치관', '인식론' 등으로 많이 일컫는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은 내게 '언어'로써의 역할을 가장 크게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 : 이민경)라는 책도 있으며, 정희진 저자는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페미니즘은 정확히는 '남성의 언어와 시각으로 보던 이 세상과 사회를, 약자(여성)의 시각과 언어로 재구성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고 말한다.


 인식론적 언어가 구성되는 것에 관한 파트는 <페미니즘의 도전>의 가장 첫 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여기서 정희진은 '남해(南海)'를 기득권 중심적인 언어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고 있다. 제주도도 인구 67만 3천명이나 살고 있는 우리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북쪽에 있는 (혹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남해'라고 불러야 한다. 이는 육지/서울 중심적인 데서 출발한 기득권규범적인 언어가 맞지만, 정작 제주도민 당사자들도 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원래 언어는 기득권/강자 중심으로 생성되며, 약자도 자연스럽게 이를 사용하게 만들어 사회의 정상 규범성을 고착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에 반기를 들며 약자의 시각과 언어로 사고방식을 재구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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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들은 적절하지 못하거나, 강자규범성이 짙은 단어들을 조금씩 바꿔 오자는 운동을 그동안 사회적으로 지속해왔다. '미혼' 대신 '비혼' 쓰기, '유모차' 대신 '유아차' 쓰기 등 처럼. 한 편 현 세대에 살고 있는 '영영 페미니스트' (young young feminist) 역시 하나 둘 씩 '언어를 바꾸는 운동'을 새로이 시도하고 있다. 주로 그들의 운동이나 캠페인의 방식은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을 통해 퍼뜨리는 방식이었으며 간혹 자금을 모아 지하철 광고를 하거나 티셔츠 굿즈, 뱃지 굿즈 등을 만들어 착용하고 다니기도 한다. 기존의 어떤 단어가 여성혐오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혹은 어원이 여성혐오적이니), 대체언어를 만들어 사용하자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보며 수긍과 납득이 가는 단어들은 나 역시 바꿔 사용하기도 했으나, 한편 '어떤 단어'의 대체어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바로 '생리/월경'의 대체어를 쓰자는 운동이었다.


 '생리'는 신기한 단어다. 그 자체의 원본부터가 '돌려 표현한' 단어다. 인간의 생리현상 등을 나타내는 단어가 그 자체로 여성의 월경 현상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마치 방귀를 뀌거나 배변을 하는 것을 '인간의 당연한 생리 현상이야~'로 돌려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돌려 표현한' 원본단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또 한편 새로운 '돌려 말하는' 단어들의 후속편1,2,3.... 들이 줄줄 존재해 오기도 한 단어다. 여남 공학 학교를 다니던 당시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들을까봐 '고구마', '그거', '리대' 등 온갖 은어를 만들어냈고, CF 및 콘텐츠 미디어 등에서는 '여성들의 그날', '매직', '마법' 등으로 돌려 말한다.


 그런데 '생리'는 애초에 '생리현상'이라는 의미로 돌려 표현한 단어이고, '월경(月經)'은 '달마다 지난다=달거리'기 때문에 이것도 돌려 표현한 단어고. 그렇기에 여성의 주기적인 자궁 내막 탈락과 출혈 현상에 관한 새로운 '직설적인' 단어가 필요하다는 운동이 온라인 상에서 종종 보인다. 그러면서 주로 보이는 대표적인 대체어는 '정혈'. 남성의 '정액(精液)'은 '정할 정(精)'에 '진 액(液)'을 쓰기 때문에, 여성의 체액 역시 돌려 표현하지 말고 '정혈(精血)'로 부르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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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액'에서 따온 '정혈'이라는 단어의 쓰임은 적합할까? '정액(精液)', 그 한자어를 풀이해 보자면 '깨끗한(정한) 액체'라는 뜻이다.


 우선 많이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깨끗하다'는 것이 그 뜻(깨끗하다clean)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흔히 '깨끗할 정(淨)' 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정할 정(精)'의 다른 의미인 '깨끗할 정(精)'을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정액이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깨끗할 정(精)'이 붙은 것이 아니라, 남성을 어떠한 '생명 정기의 시작, 출발점', '정자=생명의 씨앗'으로 보는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만들어 낸 단어다. '여자는 밭, 남자는 씨' 라는 흔한 은유에서도 알 수 있듯,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생명의 씨앗, 정(精)하고 깨끗한 생명의 기운은 오직 정자(精子)로부터 오는 것이고 여자의 난자는 '생명의 씨'로 고려되지 않는 것으로 흔히 그려진다. 정확히 보자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된 이후의 '수정란'이 생명의 씨앗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정액'은 단순히 '깨끗한 액체'가 아닌, '생명을 만드는 액체'라고 풀어서 해석이 된다. (이쯤 되면 월경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정액' 단어부터 다른 걸로 좀 바꿔야 할 판이다.) 그래서 이에서 따온 '정혈(精血)'이라는 단어는 약간 맞지 않게 된다. 깨끗한 피라는 의미도 아니고, '생명을 만드는 피'라기엔, 월경은 이미 임신이 되지 않은 포궁내막이 피와 함께 떨어져 배출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생명을 만들지 않아서 나오는 피'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정혈이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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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약 '깨끗하다(clean)'의 의미라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적합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같은 행동규정, 칭찬, 비난이더라도 그 대상이 남성이거나 여성일 때 해석되는 사회적 맥락은 정말 다르다는 것. 

 똑같이 "너 진짜 뚱뚱하다."는 비난도 남성에게 주어질 때는 단순히 '뚱뚱한 사람'으로서 해석되지만, 여성에게 주어질 경우 '여잔데 뚱뚱하다'가 되어 버린다. 또한 "너 잘 씻고 다니네."는 말도 남성에게 주어질 때는 '깔끔한 사람, 본인 관리 잘 되는 사람'으로 해석 되지만, 여성에게는 '잘 씻고만 다니는 여자'가 돼 버리는 것이다. 남성의 '정액'이 깨끗한 액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그냥 그로써 해석을 다하겠지만, 여성의 체액에 '깨끗하다'는 의미가 붙게 된다면 그 맥락과 해석은 매우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여성에게 '깨끗하다'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앞으로도 깨끗해야만 한다'는 행동규정과 가치판단이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것과 같다. 또한 '역시 여자니까 체액도 좀 아무래도 깨끗해' 라는 괴상한 가치판단적 해석도 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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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남성이 '정액'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여성도 '정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언어의 동등한 위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liberal) 시각이다. 남성의 기회 혹은 언어, 교육을 여성이 그대로 따라 받을 때 동등한 인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1세대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자체를 뿌리 뽑지 않는 한 (2세대 : 급진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이루어질 수 없는 평등이라는 것, 이미 밝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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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경의 사전적 정의는 '월경 : 두꺼워졌던 자궁점막이 떨어져 나가면서 출혈과 함께 질을 통해 배출되는 생리적인 현상으로서 성숙기의 정상적인 여성에게 일어나며, 26~32일의 주기를 가지고 3~5일간 지속된다.'(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로 나와있다. 사람마다 주기는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건강한 표준 주기는 26~32일, 즉 약 한 달이라는 것이고, 포궁 점막이 떨어져 출혈과 함께 배출되는 것이다. 단순히 표현하면 '월간출혈'이라는 거다. 반농담 삼아 '비임신성 포궁내막파열증'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사실 이게 단어가 길지만 가장 정확한 표현이긴 하다. '달마다 하는 것', '달거리(=월경)', '생리현상' 등의 돌려 말하기 표현을 배제하려면, '출혈'이나 '피'의 개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단어와, 사실만을 적시하는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월마다 출혈한다'는 의미로 '월혈'은 어떨까? 전사라는 뜻의 warrior와 발음이 비슷하여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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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혈'. 처음엔 그럴듯 하다 생각했지만, 정혈, 정혈, 정혈대, 정혈컵, 나 정혈 중이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해 보고나서야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이는 단순히 그동안 써 온 단어가 바뀌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어색함이 아니었다. '정혈'이라는 단어는 '생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기회를 주는 느낌이다. 가뜩이나 다양한 변주 표현들과 각종 은어가 존재하던 생리/월경이라는 단어를 덜 '남사스럽게' 말할 수 있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단상에 올라 5천명의 대중을 앞에 두고 "생리 중인 여성은 주로 생리통을 겪으며 배가 아픕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쉬울까, "정혈 중인 여성은 주로 정혈통을 겪으며 배가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쉬울까? 아직도 남직원이 많이 있는 회사 사무실 내에서 여직원들은 당당히 "생리대 있으신 분!" 이라고 외치기 어려운 문화고, '생리'를 '생리'라 부르는 것이 남사스럽기에, '그거', '그날' 등으로 돌려 말하기를 종용당하고 있는 문화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사회는, '생리'를 '생리'라고 또박또박 부르는 것이 더 페미니즘적이다.


 사실 이는 단어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인식론적인 거부감이 더 큰 이슈다. '생리'는 그 어감이 '생리'기 때문에 크게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생리'라서 부끄럽고, '정혈'이라서 괜찮고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다. 생리 자체의 존재가 쉬쉬되고, 생리대 CF에서는 피 대신 온갖 파란 액체로 표현이 되는 등 애써 돌려돌려 말해지는 것이 문제다. 위에서 언급했듯 물론 '생리/월경' 대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의 필요성은 확실히 있겠으나, 우선 '생리'를 '생리'라 부를 수조차 없는 인식수준과 여성혐오를 해결하는 것이 보다 우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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