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할머니의 생신이었어. 전화를 걸었지만 받을 수 없는 할머니, 알면서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응, 누구야?”라는 그 목소리가 문득 궁금해졌던 것 같은데 결국 삐 소리와 함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더라. ‘올해로 우리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더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이 나질 않았어. 내 머릿속에 그려진 할머니의 나이는 86세에서 멈춰버린 것 같아. 그때 까진 참 정정해서였을까, 아흔을 훌쩍 넘겼을 텐데 할머니에게 참 소홀한 손녀딸이네. 부모님의 생일도 그럭저럭 기억하고 있고 아이들 생일은 해마다 챙기면서 어느 순간 할머니의 나이는 잊혀 가고 있었어. 요양병원으로 가신 뒤로부터는 더욱 그랬던 기분이야.
그 옛날 할머니와 아빠는 나와 동생들을 두고 참 많이도 다투었던 기억이 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죽어버려야겠다거나 혹은 다시는 이 집에 절대 안 오겠다는 언표를 놓고는 집을 나가버리기 일쑤였지. 그러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시 우리 집으로 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희뿌연 연기를 뿜어대며 담배를 태웠고 동생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우기를 반복했어. 그러다가도 뭐가 또 언짢으면 획 토라져 다시 싸우고 떠나버리기를 반복했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해. 가끔 도시락을 두고 가는 날이면 막내를 둘러업고 한 손에는 도시락을 한 손에는 둘째 손을 잡고 학교까지 걸어와 수업 시간에 복도 창가에서 나를 크게 부르며 손을 흔들며 도시락 두고 갔다고 말하는 할머니가 나는 너무 창피해 다음부터는 굶든지 말든지 절대 가지고 오지 말라며 짜증을 부렸어. 한 번은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싹싹 비워내고 보온 도시락 맨 아래 칸에 늘 들어 있던 따뜻한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집에 와 열어보니 작은 개미 40마리가 통 안에 붙어있는 걸 보고는 헛구역질을 하며 다시는 내 도시락을 싸지 말라고 화냈던 기억도 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게 뭐냐고 되묻고 표준어로 다시 알려주기를 반복했었던 기억도 나네.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상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기라도 하면 오만 쌍욕을 퍼붓던 할머니한테 소심한 복수라도 하듯 지각하기 직전의 시간이라도 아침에 퇴근해 온 엄마가 차려준 밥은 계란 프라이 하나도 정말 맛있게 싹싹 비워 먹고는 돌아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상냥히 돌아섰던 모진 기억도 어렴풋이 나곤 해. 같이 목욕탕이라도 함께 가는 주말이면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벅벅 때를 밀어주는 할머니를 등지고 ‘진짜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이 없어!’라고 생각했었지. 먹기 싫다는 음식을 까놓고 쪄 놓고, 차려주는 것마다 나를 놀리고 괴롭히는 것만 같아 한 번도 할머니에게 다정하게 말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매번 귀찮고 듣기 싫다는 이유로 방문을 굳게 닫아 버리곤 했었던 나였네.
아이들 키우며 엄마가 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게는 납득할 만한 작은 이유라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땐 내가 잘 몰랐던 것 같아. 그냥 엄마에게는 못 된 시어머니. 자식들 뒤에서 욕하고 결국 형제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장본인. 나한테 싫다는 걸 억지도 강요하고 성질이라도 버럭 내고 나면 화를 참지 못하고 쌍욕을 퍼붓는 늙은이. 그래서 예전에 참 못 된 말이지만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했어. 사람이 늙어서 죽는 건 당연하다며 감정 없는 말을 뱉곤 했지. 평생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땐 참 할머니가 어린 마음에 서운하고 미웠어. 그냥 미움이 쌓이고 쌓였던 것 같아.
근데 지금에서도 돌이켜 보면 ‘그때 우리 할머니가 참 젊었구나!’ 그 생각이 나더라고, 지금의 엄마보다도 젊은 나이에 아이 셋을 돌봐야 했던 할머니가 육아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은 이해가 돼. 지금의 나도 너무 힘든데 그때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생들은 연년생에 돌도 안 된 막내를 두고 일하러 나가는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힘들다고 투정 부린 게 결국은 아들과의 싸움이 되고 감정에 극에 달하면 결국 뒤도 안 돌아보고 시골로 내려가던 할머니의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싶어. 집에서 태운 담배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자식 셋을 떠안고 살아가는 삶의 낙이였을지도 모르는데 매번 코를 쥐어 잡고는 “윽, 담배 냄새…”라며 싫은 티를 내곤 했었지. 요즘은 급식이라고 있지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국민학교를 다니며 싸준 도시락이 할머니에게는 또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 싶은 생각을 아이들의 소풍 도시락을 싸며 알게 됐지. 혹여나 남들 밥 먹는 거 쳐다보고 굶을까 봐 잰걸음으로 동생들까지 챙겨 집을 나서는 할머니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일제강점기를 겪고 난 할머니의 습관 같은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콕 집에 잘못된 단어라고 그런 단어는 세상에 처음 듣는 말이라며 핀잔을 주곤 했어. 할머니가 해준 만두는 맵다. 청국장은 짜고 콩비지는 냄새가 이상하다. 녹두전은 맛이 없다. 불평만 담아내던 나는 요즘 할머니가 해준 음식들이 무척 그리워. 한 번도 맛있다고 말하지 못해 미안해. 지금의 난 아이들이 맛이 없다고 할까 봐 음식 앞에서 아이들의 표정을 뚫어지게 관찰하곤 하는데 할머니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었을까 궁금해지네.
할머니가 뱉어내는 싫은 소리를 외면하고 자는척하고 모른척하고 안 들리는 척하고 그렇게 내가 스무 살의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지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 살았나 싶네. 까칠하고 무뚝뚝하고 쌍욕을 퍼붓는 할머니에게도 사랑이란 게자리 잡고 있었기에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도 그렇게 한 집에 살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지만 묻고도 싶지만 이제는 물을 수가 없네. 귀찮아서 할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나중에 다시 걸지 뭐!’라고 생각했던 때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제는 할머니가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 한편이 좀 묵직해지는 것 같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응, 민선이야? 그래… 애들은?” 하고 이렇게 대답해 줄 것만 같았던 할머니를 언제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갑자기 눈물이 나네! 할머니를 생각하며 글을 써도 큰 감정을 부풀어 오를 것 같지 않았던 내 생각은 결국 오만이 되어 버렸어.
할머니가 이런 노래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임영웅의 <사랑은 늘 도망가>라는 노래의 첫 소절의 가사가 생각나네. '눈물이 난다. 이 길을 걸으면 그 사람 손길이 자꾸 생각이 난다. 붙잡지 못하고 가슴만 떨었지. 내 아름답던 사람아' 왠지 나는 이렇게 커 버려 이제야 할머니의 의심스러운 사랑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하는데 어느새 할머니와 이런 이야기를 해 볼 수가 없네. 조금만 힘을 내서 손이라도 잡고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 요양병원에 가셨을 때 찾아가 할머니의 쪼글거리던 거친 손을 잡았던 기억이 나. 나도 모르게 울컥했는데 그 미움 속에서도 할머니는 여전히 나의 할머니였던 거야.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하고 말 한마디 부드럽게 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거야. 할머니 그냥 예전처럼 툴툴거리고 무뚝뚝하게 받아줄게. 하지만 전처럼 누구냐고 한 번만 물어봐 주세요. "나는 유순인 줄 알았다." 하고 아쉬운 목소리로 고모를 찾다 전화를 끊어 버리더라도 예전처럼 동동구루무를 바르지도 머릿기름으로 멋 낼 힘은 못 되어도 온 힘을 다해 목소리 한 번만 들려줘요. 내 마지막 소원이야. 할머니가 있어 나도 이만큼 컸고 엄마 아빠도 열심히 일할 수 있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누가 할머니란 존재를 푸근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단정 지었는지 몰라도 그런 할머니가 아니라고 미워해서 미안해요. 내가 많이 미안해. 내가 또 전화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