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못 보는 퇴마사가 내게 집착할 때

남자라는 최악의 생물

by 해파링

로비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리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나 김순지. 로코인 줄 알고 찍었던 내 인생 영화가 사실은 오컬트 호러물이었다는 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걸까. 그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3개월 전, 그 새벽으로 돌아가 내 손가락을 분질러서라도 그 과자 반죽을 못 하게 막아야 했다.


남자라는 생물은 이래서 안된다. 온갖 생물 가운데 살아서 움직이는 부류 중에서 가장 최악이다. 새벽 5시. 과자 만들기 마지막 단계. 이 덩어리 반죽을 랩으로 꽁꽁 싸매 냉장고에 넣을 것이다. 블로그 '미미빵! 쿠키빵!'(나의 최애 중 최애! 블로거는 왜 팬미팅 같은 거 안하나 몰라 =_=)에는 냉장실 휴지 30분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내 알바 아니다. 제대로 빡쳐서 두 눈이 시뻘갰다. 라라걸 선크림, 라라걸 립글로즈를 한 번, 두 번, 세 번 도톰한 아랫입술에 발랐다. 살짝 울었다는 분위기를 주려고 라라걸 치크를 눈 밑에 톡톡했다.(내가 울어? 이까짓 일로 흘릴 눈물 따윈 없다) 귀까지 덮어주는 모자는 안감이 복슬복슬했다. 푹 눌러쓰고 내 키보다 기다란 목도리를 세 번 둘렀다. 지하철 2호선 첫차는 5시 30분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벙어리 장갑은 안 내키지만 당장 보이는 게 그거라 얼른 두 손에 꼈다. 춥겠지? 밖은 엄청 춥겠지? 인상을 팍 썼다가, 안 돼 주름! 손바닥으로 이마를 팍 쳤다. 꽤 비싸게 주고 산 어그부츠는 엄청나게 따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양말을 깜빡해서 맨발이었다는 거. 그만큼 난 분노하고 있었고 머리가 살짝 돌아있었다. 시베리아 개새끼. 군인이 어깨에 총을 메듯 쇼퍼백을 멨다. 나도 부엌도 엉망진창이지만 치우고 다스리고 어쩌고 그럴 여유가 없다. 내 남자친군 분명 친척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장례식장이 전주에 있다며 가족 다같이 내일 집에 온다고 했다. 흥! 웃기시네. 여기서 니네 집에 니네 엄마가 계신다면 너랑 나랑 쫑이다. 이것은 시한폭탄 같았던 지난 몇 달간의 의심을 펑! 터뜨리 빌미이다. 해달라고도 안 했는데 수상할 정도로 낮에는 따박따박 연락을 하더니 저녁즈음 되니까 연락이 뚝, 없다. 뭐야, 행방불명이야? 설마...라고 생각 안했다. '역시'라고 바로 감이 딱 왔지. 어쨌든 시베리아 개새끼.

"다 비켜. 내가 나가신다.“

꾹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으앙, 터지고 말았다. 곱창은 다 먹고 밥 볶아 먹으려던 참이었다. 마시고 싶어도 위염이 심해서 술은 손도 안 댔다. 사이다가 찰랑찰랑한 유리컵. 조그맣고 투명한 기포들이 뽀로록뽀로록 올라왔다. 두 손 모아 꼭 쥐고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우느라 안 되는 발음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 하소연을 했다. 나의 순수했던 영혼이, 핑크빛 낭만이, 얼마나 상처받고 더럽혀졌는지 신세타령을 했다. 곱창가게는 난방이 꽝이라 오들오들 무릎이 다 시렸다. 젠장 나는 추위에 약하단 말이다. 여기는 무릎담요 서비스도 모르나? 훌쩍훌쩍 콧물이 다 난다. 베스트 프렌드 해영는 이런 나를 달래주지도 않는다. 좀 달래주는 척이라도 하지. 희고 조막만한 얼굴, 밑반찬에 집중하느라 내리깔은 속눈썹은 성냥개비가 세 개 올라간다. (진짜 실험 해봤다) 기지베. 저렇게 쳐먹는데 살도 안 쪄. 늘 나랑 똑같이 맛집가서 왕창 먹고 예쁜 카페가서 디저트란 다저트는 같이 싹쓸이를 하는데, 거짓말할 줄도 모르는 내 몸댕이만 포동포동 잘 먹었다는 티를 낸다.

"그런데 그 자식이 마지막에 뭐라는 줄 알아?"

휴지를 톡톡 두 장 뽑아 팽, 코를 풀었다. 아까부터 깨작깨작하던 해영이 젓가락이 멈췄다. 뭐래?라는 의미를 담아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다시는 자기집에 오지 말래! 으앙-"

그랬다. 나한테 뻥, 차여도 할말 없는 판에 '우린 여기까지인가 보다' 지가 먼저 나를 찼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돌아서는 나를 부르더니, 다시는 자기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날. 밤새 과자 반죽을 하고, 첫차를 타고, 그의 집에 갔다. 갔더니 그의 엄마가 현관을 열었다. 아줌마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난다. 부디 열리지 않길 바랐던 현관이 열리니까 별의별 생각으로 부글부글 끓던 뇌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뭐가 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아들 없는데에- 내일 온다고 했는데에-" 끝을 길게 끄는 저 말투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나는 아줌마 말이 끊나기 무섭게 꾸벅 인사하고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자꾸 거짓말이야. 진짜 끝내자는 거지? 내가 욱하는 성격인지라 바로 따다다 쏴대고 헤어져! 톡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내가 일하는 데로 찾아왔더랬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다시는 자기집에 오지 말란다. 시베리아 수박새끼. 너 여자 생겼지? 속으로 의심 아닌 의심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역시 그랬다.

"울지마! 왜 울어! 남자 많아!"

곱창집 아줌마였다. 주문한 볶음밥이 나온 것이다. 그까짓 남자가 뭐라고 울어? 이렇게 덫붙여 말하신다. 밥을 볶아대는 아줌마의 유연한 손놀림이 어쩐지 더 멋있어 보였다.

"그까짓 남자가 아니에요."

나는 남자 하나 때문에 질질짜는 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밥을 볶다말고 아줌마가 나를 보고, 해영이는 또 무슨 이상한 소릴하려고 그러니? 라는 눈빛을 하고 있다. 콧물이 자꾸 나와서 나는 또 코를 팽 풀었다.

"그까짓 사랑 때문이에요!"

으아앙- 아예 목놓아 울어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서러웠다. 어째서 하늘은 내게 로맨스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냐. 뭐? 자기집이 뭐가 어째? 내가 스토커냐! 사기는 지가 쳐놓고 누굴 범죄자 취급이야!

"뚝! 먹고 정신차려. 치즈 곱빼기야."

아줌마는 치즈가 스트레스에 좋다고 했다. 다 볶아진 것 같은데 어째 자리를 뜨질 않는다. 하긴 동네장사에 월요일 오후 4시부터 곱창집에 죽치고 앉아있는 손님은 우리밖에 없다. 한가하고 복닥거리지 않아 좋다.

"사람이, '에이'라는 부분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했다가 그 '에이'라는 것 때문에 결국은 헤어진다더라."

앞뒤 설명도 없이 해영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런 말이 지금 왜 나오는데? 나는 어리둥절해하는데,

"맞아, 맞아!"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며 아줌마가 마구 동의를 한다. 아주아주 공감하시는 눈치를 보아 뭔가 사연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래서 뭐."

우적우적 볶음밥을 씹어댔다. 또 나도 모르게 인상이 팍 써져서, 주름! 외치고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그냥 그렇다고. 멋있는 말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어."

"지랄맞은 년."

저희 소주 한 병 주세요. 실컷 울고나니까 술이 당겼다.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어쩐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너 반, 나 반, 딱 한 병만 하자. 스스로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싫어. 너나 마셔."

늘 느끼는 건데 해영이는 얼굴이랑 말투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막걸리도 하나요." 게다가 의외로 막걸리만 취급한다.

"오예! 막걸리다!"

그리고 나는 섞어 마신다. 그게 제일 나한테 딱이다. 소주만 마시면 너무 쓴데 뭐라도 섞어주면 일단 목넘김이 좋아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물론 이러다 훅 간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알아서 해. 난 모른다."

"냉정한 년."

나, 김순지. 서른 다섯 살... 그 언저리...

현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래봬도 열심히 자라는 중이다. 쑥쑥. 씩씩하게.

끝내주게 화창한 아침이다. 하늘은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저런 구름을 솜사탕같다고 하던가? 저 희고 통통한 덩어리에 '내 거 찜♡' 침을 묻히면 사르르 달콤해질 거라니. 귀여워라 후후. 후으읍-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하아~ 공기가 차다. 차고 맑다. 탁, 나름 우아하게 닫는다고 닫았는데 힘 조절이 안 됐는지, 끝에 닫히면서 창문이 튕겼다. 이러면 꼭 신경질 낸것 같잖아. 다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고. 마시고오- 내쉬고오-. 아침 시작부터 이러지 말자. 열라캡쑝 열라캡쑝 에브리바디 열라캡쑝.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할 때 이렇게 말하면 꽤 먹힌다.

창문 너머 하늘을 멍-하니 고민하다가, "좋아, 오늘은 핑크핑크 스트로베리 핑크다." 이렇게 정했다. 화장대에 핑크란 핑크는 죄다 꺼냈다. 딸기우유, 발레리나 핑크, 펑키핑크, 체리쥬빌레, 샤이닝핑크... 핑크펄 아이라이너로 속눈썹 사이사이 집중해서 메꾸고, 체리쥬빌레 광대뼈에는 은색 보석 스티커도 붙였다. 이것은 딸기씨를 표현한 것이라며. 길었던 머릴 칼단발로 바꿨다. 고데기로 아웃 C컬을 해줬더니 꽤 마음에 든다. 밖은 겨울이지만 여름 쉬폰 원피스를 골랐다. 퍼플색에 쇄골이 드러나는 홀터넥. 이제 됐... 아차차! 큰일날 뻔. 딸기우유 립스틱, 베이비핑크 립글로즈를 까먹을 뻔했다. 그렇지, 입술은 이런 식으로 질감과 색깔이 다른 두 가지를 써줘야 한다.

"완벽해! 퍼얼~펙트!"

아이스크림 타임! 패밀리사이즈 사이즈를 딸기 아이스크림으로만 꽉꽉 채웠다. 부족하다. 토핑으로 초코링, 초코 크런키, 초코청크, 초코 시럽에 스프레이 휘핑크림 500g(맹세컨대 이 한 통을 내 기필코 다 비우리라). 여기까지 품에 안고서야 알라뷰 얘들아, 배시시 웃었다. 이대로 침대로 점프! 나는 '어글리 베티'를 틀었다. 십년도 더 된, 이 올드 드라마를 보며 나는 나 자신을 구원했다. 아무리 시즌이 지나도 변함없는 촌스러움. 베티는 정말 한결같은 여자야, 후후. 변함이 없어, 변함이. 후후후. 나는 베티의 빨강 안경도 파랑 치아 교정기도 좋아했다. 이것들이 없으면 베티는 베티가 아니니까. 베티, 넌 나를 배신하면 안 돼. 뼈마른이니 뭐니 절대 노노노! 알록달록 너의 패션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너는 지켜줘야 해.

"그러지 마. 베티."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를 위해 베이비샤워라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베티가 멍청하다고 나무랐다. 나무라며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푸고 휘핑크림으로 입안 가득 채웠다. 거기에 갖가지 토핑을 토핑이 아니라 우적우적 씹어댔다.

"거 봐.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빵순이? 니가 왜 여기서 나와? 우리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빵순이 본명은 '박장미'인데 빵순이란 별명은 빵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가슴 빵빵 엉덩이 빵빵, 빵빵한 몸매 때문에 내가 붙여준 별명이다.

"아이스크림? 휘핑크림?"

빵순이가 내게서 밥숟가락을 뺏었다. 눈을 뒤집어 까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버려 둬. 몸까지 날려가며 밥숟가락을 도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니가 돌았구나, 순발력은 빵순이가 한 수 위였다. 그 바람에 휘청, 침대와 박치기를 하고 만다. 고개를 드니 빵순이는 없고 해영이가 있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이지만, 쯧쯧, 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들었다고!

"얘야? 아님 얘? 어느 년이야?"

빵순이가 내게 자기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마마보이 SNS 화면을 쉭쉭 넘기며 어느 년이냐고, 마마보이를 꼬신 여자가 누구냐고 캐묻는다. (여기서 마마보이는 내 전 남친, 그러니까 내가 이 꼴을 하고, 이 화창한 날씨에, 이 아침부터 정신 나간 짓을 하도록 동기부여를 한 남자를 말한다.) 여자 둘 다, 딱 봐도 어려보였다. 그 년이 누구든 이 년이나 저 년이나, 나는 그게 제일 싫었다. 마마보인 나랑 동갑이었다. 자기보다 어린 애들은 대화 수준이 안 맞는다며 여자 친구로서 꽝이라고 했었다. 꽝? 꽝같은 소리하고 있네. 꽝이나 먹어라. 꽝!

"의미 없다아-"

없다아, 소리를 내며 입안 가득 휘핑크림으로 채웠다. 숟가락 이리 줘. 먹을 거야.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안고 손을 뻗었지만, 어허! 어딜 감히! 가차없이 숟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내려친다. 못 됐어. 다 못 됐어. 나만 빼고 다 못 됐어. 왠지 서러워 눈물이 찍 다 난다.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그러니까 내가 짠! 하고 이렇게 왔잖아."

너가 울렸잖아! 그리고 복수같은 거 안 해. 하기 싫어. 그럴 기운도 없다고. 빵순이는 자꾸만 내가 마마보이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륜과 복수, 온갖 치정이 난무한 드라마 광인 그녀였다. 아무래도 즐기는 거 같은데. 저봐, 저봐, 웃고 있잖아.

"추해. 그런 짓 했다가 노처녀 히스테리란 말 듣기 싫어."

"노처녀? 누가 노처녀야? 요즘 같은 세상에 삼십대면 아가지. 아가. 너, 자꾸 그런 소리하면 국제적으로 돌 맞는다고."

빵순이는 자기가 '국경 없는 30대 독신여성 클럽' 회원이라고 했다. 그런 게 있어? 진짜인지, 진짜면 대체 뭐 하는 데인지, 수상하다.

"김순지. 정말 이럴 거야? 이렇게 패배자가 되어 패밀리 사이즈 아이스크림 중독자로 초코시럽이나 빨다가 뚱뚱보 할머니로 늙어 죽겠다고?"

"뭐? 내가 그렇게 살다 죽는다고? 안 돼!"

"잘 들어. 집중하라고. 여자의 적은?"

"여자."

빵순이는 내게 질문했는데 대답은 해영이가 했다. 빵순이가 나이스 해영, 엄지척을 보냈고 해영이도 기본이지, 똑같이 엄치척을 한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30대 여성으로서 파워를 보여주자고. 이건 복수가 아니야. 언니의 영역을 침범하면 어떻게 되는지 반성할 기회를 주는 거지. 언니. 언니는 감히 건드리는 게 아니야. 우린 그걸 가르쳐주는 거야."

"언니... 나는 언니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쩐지 나는 납득하고 있었다. 얘가 맞지? 빵순이가 내민 사진은 우리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렇다. 적은 가까이에 있는 법.

"내 이럴 줄 알았어! 구미호 같은년! 꼬리를 몽땅 뽑아주겠어. 가자, 가서 박살을 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