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물은 안 내렸지만 교양은 챙겼습니다.
페르몬이 빠바방! 하면 남자랑 여자랑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빠바방! 빠바바방! 그 빠바방이 내게도 왔다.
"어제 수업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지 뭐예요. 교과서만으로는 지루해요. 공부는 재밌어야죠. 얘들을 위해서 밤 새는 것쯤이야. 호호. 이래서 내가 늘 카페인이 필요한가봐요. 지금도 라테 너어어무 그리워요. 그럼 저녁에 카페로 갈게요, 로비. 부탁해요, 내 라테♡"
내 라테♡. 여기까지 완벽하게 내숭을 떨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 나는 '로비'와 데이트하는 사이다. 즉, 로비는 세라의 아빠이고, 나는 이제 진짜로 그가 만들어 주는 라테가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또 하나, 내 라테♡에서 '라테'는 로비의 애칭이기도 한데 정작 본인인 로비는 모르고 나만 아는 애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칭은 애인한테나 쓰는 거지 우린 아직 거기까진 아닌 까닭이다. 하, 이런 걸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다. 나만 안달난 것 거야? 좀 짜증나지만 어쩌겠어. 자칫 잘못하다가 겨우 여기까지 끌어온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그냥 가벼운 데이트야. 남자랑 여자랑 만나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다들 하는 거, 알잖아? 살짝 평범하지 않다는 부분이 있다면, 들키면 살짝 곤란하다는 정도? 요만큼, 살짝 조금?
"헤어지려고. 미쳤니? 결혼은 무슨. 그냥 심심풀이 땅콩이야."
변기물을 내리려고 했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다.(러브러브를 위해서라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그와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뭐 어때서? 러브러브에서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데. 타이밍 하나, 하나, 절대 놓칠 수 없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구미호였다. 마주치기 싫은 사람일뿐더러 헤어진다는 소리에 마마보이가 생각났다. 마마보이랑 뭐가 있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럴려고 했던 건 아닌데 엿 듣는 꼴이 되버렸다.
"내가 아까워. 난, 사모님 소리 들을 거라고. 정말로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힐 거라고. 이 손에 물이 묻는다면 그건 네일아트 받을 때 쓰는 뜨거운 손수건이겠지."
"하긴, 수학쌤 아직도 엄마랑 산다며? 마마보이가 별명이라던데. 알았어?"
"완전 몰랐어! 짜증나."
"그러게 왜 사귀었는데?"
"말했잖아. 심심풀이. 망나니 학교에 말 잘 듣는 펫 하나 잘~ 길러놓으면 얼마나 편하고 재밌는데. 너도 해봐. 타로쌤 어때?"
"우웩!"
"쿠쿠쿠. 좀 그렇지?"
"좀이 아니지. 좀이."
또 한 사람은 누군가 했더니 패션모델과 선생이었다. 무용 선생하고 패션모델과 선생하고 둘이 속닥속닥 어울려다니는 건 다들 아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구미호는 마마보이랑 헤어지겠다 한다. 남녀 사이에 만나고 헤어지고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어쩐지 불쌍하네 마마보이. 언제 이별 통보를 받을 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구미호의 개 노릇이나 하게 생겼네. 이거, 말 해줘야 할까? 아니아니, 내가 왜? 꼴 좋다. 마마보이. 흥! 하나도 안 불쌍해. 흥!
"그 난리 치고 둘이 사귀는 거 다 까발려졌는데, 깨지면 좀 그렇지 않겠어?"
"무슨 상관이야. 하여간 늙은이들, 사귀면 다 결혼하는 줄 알아요. 됐어. 나 요즘 만나는 사람 따로 또 있어. 완전 돈 많아. 선생 때려치우지 뭐 까짓거."
"짠하네, 마마보이."
"그러면 너가 데려가주든가."
"됐거든. 아, 둘이 다시 사귀는 거 아니야? 그 난리를 칠 정도면 죽도록 사랑했다는 건데. 같은 학교겠다. 금세 정분 나겠네. 정분나."
"뭐! 진짜 싫어!"
"왜? 필요 없다며."
"아무튼 그 여잔 싫어."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도 싫거든? 나도 만나는 사람 있다고! 일부러 이 타이밍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화알~짝 웃어보인다. 어깨 쫙 펴고 세면대 앞에 서서 우아하게 손을 씻었다. 거울 보니, 우리 세 사람 얼굴이 나란했다. 젠장 내가 제일 얼굴이 크다. 그렇지만 자기들의 비밀 얘기를 내게 들켜서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들을 보자니 어쩐지 재미있었다. 어머, 미안. 어쩔 수 없이 들어버리고 말았네. 좀 짜증나는 얘기였지만, 뭐~ 괜찮아. 걸즈 토크가 그렇지 뭐. 이해해. 왜냐면 나는 지금 무지하게 러브러브하거든. 킁킁. 이거, 커피 향인가? 어머, 화장실 냄새가 커피 향으로 느껴지다니. 나도 참.
"어디서 커피향 나지 않아요?"
진짜로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둘은 똥 씹은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뭐 씹은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니에요. 제 기분 탓인가 보네요. 나중에 같이 커피 한잔 해요." 교양을 잃지 않았다. 보란 듯이 휙, 뒤돌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깜빡하고 물 안 내렸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