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장놀이
잘 놀아본 적이 있니? 정말 질릴 정도로 신나게 열정을 다해 놀아본 적이 있니?
결핍을 살았던 나는, 풍요를 사는 너희들에게 신나게 놀던 시절을 자랑하려고 해. 해가 떠서 어두워질 때까지 놀고, 집에 와서 또 놀고, 놀았던 즐거움이 배고픔 따위에 지지 않았던 시절 말이지.
나에게는 공부 잘하는 다섯 살 위 언니와, 공부 빼고 자신이 원하는 건 다 잘하는 두 살 위 오빠가 있어.
나는 말 잘 듣는 겁쟁이에 유난히 작고 마른 꼬맹이였지.
1980년대, 서울의 가난은 좀 유별났어. 너무 비교되었거든. 머리끝부터 발끝, 하물며 얼굴 피부와 키 까지.
있는 집 애들은 대부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어. 그리고 말도 잘하고 선생님하고 친하기까지 하더라. 8살 꼬마는 그때부터도 낄끼빠빠가 뭔지를 알았다니까. 어른들이 억울한 소리를 해도 변명도 못하는 그런 소심하고 생각만 많은 애였지. 그렇게 친구도 못 사귀는 나에게 언니랑 오빠는 가장 좋은 친구였어. 좁은 단칸방은 우리의 무한한 놀이터이기도 했지. 언니오빠는 나의 좋은 친구였다면, 나는 그들의 살아있는 장난감이며 동시에 늘 챙겨줘야 할 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아무튼 내 기억 속에 정말 재미있었던, 너무 재밌어서 눈 뜨면 하고 싶고 밤에도 안 자고 하고 싶던 놀이. 그건 시장놀이였어.
모든 걸 잘하는 우리 언니, 오빠는 일단 창의력이 뛰어났어. 세상에 뭔가 신기한 게 나오면 가난한 엄마를 조르는 대신 직접 만들어내는 머리와, 그림 실력, 그리고 원래 게임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규칙까지 완벽했지.
그 방학, 우리 집은 엄마가 모든 걸 걸고 인수받았던 양복점이 사기를 당하면서 급하게 도망치듯 경기도로 이사를 해야 했어. 다가구 주택에 옆집,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 거실을 쓰는 옆방) 세 아이들은 큰 아이가 내 또래였어.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한 집 여섯 아이들 같았지.
나의 빛나는 언니, 오빠는 새로운 놀잇감을 만들어냈지. 이번 놀이는 간단했어. 집안에 있는 모든 잡다한 것을 영역별로 나열해서 시장을 차리고, 판매자와 소비자를 정해서 각자의 매장을 운영하며 소비도 하는 구조였지. 지금 생각하면 그 놀이가 진행이 된 게 신기해. 돈을 많이 버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던 거 같은데, 그럼 물건을 팔고 소비를 덜 하면 되는 건데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게, 그래서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 거 같아. 자신의 판매대에 잡다한 박카스병, 실뭉치, 낡은 인형, 책... 이런 것들을 음식의 이름을 붙이고 명작의 이름을 주어 가격표를 붙여. 그리고 하나하나 손님이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을 설명해 주고 돈을 세고 거스름돈을 주는 거야. 손님일 때는 나름 무엇을 사야 하나 선택하며 고민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거 같아. 이제 생각하면, 왜 돈을 그렇게 많이 만들었나 싶을 만큼 가짜돈이 많았어. 100원, 500원 단위가 아닌 천 원, 만원, 오만 원, 십만 원... 이런 단위의 지폐들을 사용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라는 언니, 오빠의 숨은 뜻이었을까? 암튼 무엇이든 잘하는 언니, 오빠는 나랑, 옆집 동생들이랑 시장놀이를 시켜주며, 규칙과 질서가 무엇인지 의도치 않은 산 공부를 시켜준 거지.
인사를 하면서 예의를 익히고, 무엇이 싸고 비싼지 욕구와 가치를 배우고, 물건을 팔면서 설득을, 가격을 깎으면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을 인식도 못하고 배우게 된 거지. 돈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돈 없는 우리가 밤새는 줄 모르고 즐겁게 경험할 수 있었던 거야. 결핍을 모르는 그들의 경험보다, 우리의 짜릿한 시장놀이의 경험이 훨씬 큰 만족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들의 경험이 솔직히 부럽지ㅎㅎ)
시장놀이의 즐거움에 딱 떠오르는 건, 그 가짜 지폐. 쓰던 스케치북을 자로 일정하게 각을 맞춰 3:4로 손에 꽉 차는 사이즈로 잘라서 한 장 한 장 힘을 주어 또박또박 숫자를 적어 넣은 그 지폐야. 우리는 어렸지만 그 지폐에서 뭔가 모를 위엄과 정성을 느꼈어. 그래서인가 한 장도 접거가 잃어버리지 않고 놀이가 끝나면 같은 단위끼리 모아 잘 정리하는 것까지 즐거움의 의식이었던 거 같아. 이제와 생각하면, 그깟게 뭐가 재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즐거웠어. 행복했어. 어린 동생과 더 어린 옆집(방) 동생들과 놀아주던 나의 반짝이는 언니, 오빠의 시장놀이는 질서 정연했고, 규칙이 있었고, 인정과 배려, 그리고 돈을 버는 즐거움과 돈을 쓰는 만족을 두루 갖춘 경제놀이였던 거야. 그 이후로 가짜돈이 시기마다 유행처럼 문방구에 나와도 내 눈에는 유치하고 우스워보였다니까. 어른이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훨씬 예쁘게 인쇄되고 색깔도 있는 문구점 가짜돈을 지나치면서 떠오르는 기억에, 차오르는 따스함에 웃음이 나더라.
언니, 오빠가 그렇게 키운(?) 동생은 사실 아직도 경제관념이 별로 없긴 하다. 그 시장놀이엔 인정과, 진솔함과 열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너어무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몰랐던 행복의 기억을 사 올 수 있었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어린 날의 가난의 고통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유통기한이 긴 행복을 사 온 시장놀이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어. 엄마, 아빠의 손 대신 휴대폰을 쥐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시장놀이 할래?" 하고 손을 내밀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