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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Mar 05. 2021

크로#30. 자그레브2: 천년의 도시, 자그레브의 역사

여정 마지막 날, 여행 마무리를넘치게책임져준자그레브 숙소

마지막 여정 자그레브 숙소는 잘 꾸며진 오래된 아파트

숙소에 도착해보니, 호스트가 가방을 집안에 들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오래된 유럽 아파트형 숙소는 기대 이상의 품격이 느껴진다.

4층 석재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걸로 보아,

지은 지는 꽤 된 듯한데

거실, 침실, 욕실, 부엌, 앞 뒤 베란다로 구분된 공간의 규모가

중상층 이상의 거주지였음직 하다.

각 실의 가구들도 나름 만만치 않은 것들이다.  

흰 레이스 커튼이 깔끔한 부엌에는 다양한 조리기구에,

양념류 채워진 냉장고, 소모품 부엌용품까지 골고루 갖춘 싱크대(심지어 고무 밴드까지)가 널찍하게 자리한다. 바나나, 사과 등 과일도 멋스러운 도자기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져 있다.

월 풀 욕조는 너무 큰 데다, 하룻밤 묵으면서 사용하기엔 미안해서, 'pass'다.

전망 좋은 앞뒤 베란다에선 거리와 옆집 마당이 내려다 보인다.

하루만 묵게 된게 아쉽다.

널찍한 거실
침실. 주인의 조부께서 제작했다는 원목가구들이 놓여있다.
거실의 에나멜 입힌 벽난로
각종 양념, 다양한 조리기구가 두루 갖춰진 넓은 부엌
식사공간
뒷쪽 베란다
베란다를 통해 내려다 동네
숙소의 옆집
길 건너 마이마라 박물관

친절한 호스트, 젊은 청년은 내일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오겠다며 돌아갔다.

이번 여행의 모든 숙소가 다 저마다의 특장점으로 만족감을 주었었다.

마지막 숙소인 이 곳 또한, 오래된 유럽식 도시 주택에 머물러 보고 싶은 소원을 성취시켜주면서,

여정을 멋지게 여며준다.

동반자 다음으로 중요한 여행의 요소가 숙소라고도 하지 않던가!

매 도시마다 중요한 베이스가 되어 준 고마운 숙소들이다.

몇 개월에 걸쳐 숙소를 쫀쫀하게 검색, 또 검색하며 쏟아부은 긴 시간 투자에 대해,

보상을 넉넉히 받은 셈이다.


돌라트 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식재료로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숙소를 나선다.


천년의 도시 자그레브의 역사

큰길 따라 걸으니 왼편에 자그레브 예술 및 공예 박물관 (Museum of Arts and Crafts, Zagreb),

오른편에는 1895년 10월 14일에 개장했다는,

멋진 건물 크로아티아 국립극장을 지나게 된다.

당시 도시 외곽 박람회장 부지에 건설된 국립극장의 1895년 10월14일 개장 모습 (국립 극장 홈페이지)
국립극장 전경 (크로아티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자료)
위에서 본 국립 극장 (관광청 자료)
국립극장 주변 시가지 (관광청 자료)

길을 건너니 1669년에 설립, 약 350년의 역사를 가진 자그레브 대학교이다.

1396년 설립한 자다르 대학보다 약 270년 늦은 것은 두 도시의 발달사에 준하는 것이리라.

어쨌든 남부 유럽의 유수한 대학에 든다고 하며, 십 수년 전에 우리나라 대학과 학술교류를 체결했다고 한다.


계속 직진하여 한 블록을 더 간다.

한쪽은 옛 모습 그대로, 반대편은 새 손질이 더해진 건물들이 경사로 양 편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세월 덧입은 이 거리의 건물들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트램 길 따라 걷다가 건물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 동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있다.

우리는 점차 아랫동네에서 자그레브의 원래 동네인, 윗동네 그라데치로 오르고 있는 중이다.

계단 끝의 스트로스 마이어 산책로(Strossmayer Promenade)를 조금 걸으니,

푸니쿨라 승하차장이 나타난다.

자그레브의 로어 타운과, 어퍼 타운인 그라데치 지구를 연결해주는 40m를 운행한다고.

그 바로 앞에 흰색 4층의 로트르슈차크 탑( The Lotrščak Tower)이 서있다.  


13세기 자그레브와 로트르슈차크 탑( The Lotrščak Tower)


"자그레브"라는 이름은 1094에 슬라브 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한 후

캅톨에 자그레브 교구가 설립될 때 처음 사용,

1242년에 자유 왕실 도시가 되었고,

1845년에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1851년에 최초의 시장 Janko Kamauf가 선출되었다. ( Wikipedia)    

로트르슈차크 탑( The Lotrščak Tower) (공식 홈페이지)


발칸반도의 중심 도시들은 베네치아에서 소아시아를 잇는 아드리아 해안의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다르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뒤늦은 자그레브 성장은 토미슬로브왕의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이 몰락하고,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면서다.

헝가리 왕국은 마자르족인 초대 왕 이슈트반을 추대하여 1000년, 가톨릭을 국교로 세워졌다.

당시 동방정교회와  교세다툼으로 헝가리는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가톨릭 확장의 역할에 열심이었다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던 헝가리는 크로아티아를 지배하게 되었고, 라슬로 1세(라디슬라스 재위: 1077년 ~ 1095년) 시대에 자그레브에 대규모 성당을 1094년에 세웠다. 당시 자그레브 서쪽 그라데치(Gradec)지역에는 상인과 농부가 거주하게 하고, 동부의 카프톨(Kaptol) 지역에는 성직자들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공포의 몽골군 말발굽이 유럽에 몰아친 13세기.

1237년~1240년에 걸쳐 당시 러시아 전 영토를 정복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튼 칭키스칸의 장손자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를 맞아

헝가리왕 벨라 4세는 1241년 4월, 모히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헝가리는 철저히 파괴, 약탈되어 몽골군의 점령 하에 놓였다.

벨라 4세는 자신의 가족, 궁인들과 자그레브를 거쳐 달마티아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집요하게 왕을 쫓던 몽골군은

(때마침 천운으로!)

황제 오코타이의 죽음에 따른 차기 황제 선출 문제로 갑자기 돌아가게 되었다.


이틈에 귀환한 벨라 4세는,

몽골의 재침을 대비, 이미 공성전으로 피폐해진 수도 에스테르곰을 떠나, 부다페스트에 부다 성을 쌓았다.

그리고

피난 과정에서 은신처와 환대를 베푼 보답으로, 1242년 그라데치(Gradec)를 왕실 자유도시로 선포하였다.

자유도시는 성벽과 방어탑을 세워 도시를 요새 화할 의무가 있어서, 이후 20년 동안 요새화를 진행하였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요새를 쌓은 곳은 방어에 성공했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왕의 대대적인 계획이기도 했다.

1266년 공사가 완공되고,

로트르슈차크 탑( The Lotrščak Tower)은 도시의 남쪽 성문, 드베르체 성문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탑은 100년 동안 대포로 매일 저녁 성문 폐문 시간을 알려, 시민들이 요새의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주었다.

본래 이 탑은 2개의 층으로 이뤄진 건물로 추정하며, 1857년에 중세 건물의 재건축이 이뤄지면서 두 개의 층이 추가되었고, 지붕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었다.     

드베르체 성문은 1812년 남부 산책로, 현재의 스트로스마이어 산책로를 만들기 위해 철거되었다.

(북쪽 문은  ‘돌의 문’이다.)


탑에서 성 마르코 성당으로 가는 골목에는

유명한 실연 박물관(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과, 나이브 박물관( Croatian Museum of Naïve Art)이 있으나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대로 지나친다.

이제 옛 자그레브의 중요한 거주지인 그라데치 언덕의 중심, 성 마르코 광장으로 가 볼 차례다.


자그레브의 옛 모습, 두 언덕

왼쪽 언덕 성 마르코 성당, 오른쪽 캡톨 언덕 성스테판(대성당) 성당.(크로아티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사진)

중세의 자그레브가 두 개의 언덕인 'Gradec'와 'Kaptol'로 나뉘어 있다.

두 언덕 사이의 저지대는 오늘날의 Tkalčićeva 거리이며

(돌라체 시장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가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 이름),

그 도로포장 아래에는 여전히 Sava 강이 흐른다고 한다.

외세의 공격 위험이 사라지고 도시가 점차 평야로 확장되면서,

두 언덕 정착지 아래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광장이 형성되었는데,

그곳이 반 옐라치치 광장이다.


upper town: 중앙의 성 마르코 성당과 광장 (크로아티아 관광청 공식 홈페이지 사진) 광장 주변 4변의 건물이 관공서이다.


성 마르코 성당

성 마르코 성당 정면 출입구에는  14세기 말 조각가 팔러의 유명한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사진에서 익히 보았던 성 마르코 성당의 지붕이 보인다.

원색의 타일로 만든 이 지붕은 왼쪽은 크로아티아의 문장, 오른쪽은 자그레브 시의 문장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 관광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이다.


자그레브 교구 성당인 이곳은 1256년 처음 건축된 후,

여러 차례 보수와 추가 공사를 거쳤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14~15세기에 걸쳐 건축된 고딕 양식이며,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특히 중앙 출입구의 15개의 조각상들 중, 남쪽 문 부근의 ‘예수와 열두 제자 상’은

동유럽의 조각 상중 가장 유려한 조각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오늘따라 촬영 방송장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까이 들여다볼 수가 없다.


성당 앞 광장을 중심으로 4면에,

크로아티아 관공서가 둘러싸고 있다.

성당 뒤편에는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  

바라보아 왼쪽은 크로아티아 정부 청사, 오른쪽에 크로아티아 의회,

그리고 성당과 마주 보는 건물이 자그레브 시 의회이다.

성당 뒤편의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 Croatian Constitutional Court)
크로아티아 정부 청사 (Croatian Government) 청사 뒷쪽에 예전 대통령관저가 있었다고.
크로아티아 의회 (Croatian Parliament)
Europa za građane (시민을 위한 유럽):다양한 유럽 국가의 시민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및 협력기구


여전히 가스등 켜는 마을

골목마다 깔끔한,

베이지 혹은 노란색 건물들 벽에 걸린 가로등은,

전통적 방법으로 불을 켜는 수동 가스등이라고 한다.

1863년부터 시작, 150주년을 맞이한 2013년에는 우표로도 발간되었다는데,

정해 진 시간이 되면 여전히, 등을 켜는 사람이 나타나, 한 개씩 불을 붙인다고 한다.

시간과 속도가 경쟁요건인 이 시대에 살아남은, 드문 사례인 듯하다.

추억과 정신적 유산을 지닌 전통이 우위일수 있음을,

그래서 효율성만이 최고 가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例라고 봐도 될는지...

자그레브 윗동네, 수동으로 가스등 켜는 마을은,

오늘부터 여행자의 기억 한편을 차지할 것 같다.


가스등


돌의 문

자유 왕실 도시로 선포된 13세기에,

그라데츠(Gradec) 요새를 지키는 문으로 건축되어,

700년의 역사를 가진 북쪽 문이다.

초기에 소나무로 만들어졌다가, 18세기경 돌로 다시 만들어졌다.

하지만 1731년의 대화재 당시,

성문에는 많은 나무 장식이 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불타버렸으나,

그 재 한가운데, 액자만 탔을 뿐 그림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성모 마리아 그림이 발견되었다.

이후

기적적인 힘을 지닌 그림으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돌의 문 제단은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스톤 게이트의 깊이 들어간 부분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성모 마리아 그림을 모셔놓았다.

현재의 건축물은 1760년에 다시 건축한 것이다.

1778년에는 정교한 바로크 양식의 철문을 만들어 제단 주위를 감쌌다.

그림에 있는 금으로 된 왕관은 1931년에 새로 덧붙여 그려 넣은 것이다.

지붕 모양의 돌문만이, 남아있는 원래의 모습이라고 한다.

스톤 게이트 내부
성모 마리아 그림이 모셔져서 제단이 설치된 곳: 기적을 구하며 기도를 올리는 장소
돌의 문을 통해 Gradec로 드나드는 입구


성 조지 상(게오르기)

조지는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난 귀족으로 로마의 군인이었다.

그는 어느 나라를 지나다가, 

라시아(Lasia) 부근 호수에 독기를 뿜어내며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악룡의 제물로 바쳐지게 될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사연을 듣고, 자청하여 목숨 건 대결로 용을 였다.

이 일을 통해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왕국의 사람들에게 전파하였.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인 302년, 종교탄압으로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순교하여 성인이 되었다.

동상의 아래, 그가 죽인 용이 놓여있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한 전설 때문인지, 그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이 되어있다.

성 조오지 동상과 용
성 조시 상 뒤로, 스톤게이트 들어가는 길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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