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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Feb 23. 2021

크로#29. 자그레브1: 대성당에 서린 파괴의 역사

크로아티아 여행 12일 만에, 출발지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 되돌아오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로 야간 버스 이동

밤 9시 반에 출발한 버스는 약 500km를 8시간 반 동안 달려서,

자그레브에는 오전 6시 도착할 예정이다.

손님이 별로 없으니 최대한 긴 대각선으로 몸을 뉠 수 있어 다행이다.

거기다 뜨거운 물과 커피가 버스에 준비되어 있다.

바다를 끼고 달리며, 드문드문 나타나는 도시와 마을의 불빛을 헤집어 달리던 버스는

이윽고 산 위로 올라서더니,

거대한 바위 사이사이로 숨은 별과 숨바꼭질을 시켜준다.

밤이면 더 초롱해지는 여행자의 상념도 어느덧 잠에 항복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 너머 새벽하늘이 부윰하게 열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버스는 자그레브 터미널에 들어선다.

크로아티아 여정을 시작한 4월 15일로부터 12일 간의 여정을 마치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예의 그 유명한 베이커리는 이미 현지인들로 가득하다.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우리도 아침을 먹는다.

유리창 너머의 트램 정차장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토해내고 삼키기를 되풀이하며,

자그레브의 아침을 깨운다.


12시 예정의 체크인 시간까지는 한참이나 남았지만,

일단 가방을 숙소 근처에 맡길 요량으로 나선다.

마침, 시가지 저편, 이른 시간에 뜬 무지개가 선명하다.

더 바랄 것 없는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음에 감사하며,

남은 일정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을 무지개에 걸어본다.

걸어서 숙소로 

예약 숙소는 Mimara 미술관 근처라서, 6번 트램을 타면 10분이 채 안 걸리지만,

시내 쪽으로 나있는 Kneza Branimira 거리 2.5km를 천천히 걷는다.

시내 관광은 도보가 제일이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좀 보내야 한다.

30분 족히 넘을 거리를 가방 끌며 걷기 시작한다.

건널목마다 도로 턱이 있어서 가방을 들고 내리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른 시간이여선지, 자그레브와 첫 대면하는 이 거리의  느낌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계속해서 옆으로 지나가는 트램 안, (출근길?) 현지인들의 쏟아지는 시선이, 좀 어색하다.

동양인이 없진 않은데도, 우린 여전히 이색적인 모습으로 비치나 보다.

가다 보니 자그레브 기차역이 나타난다.

이 중앙역에서는 부다페스트, 빈, 취리히, 슈투트가르트, 베네치아와 연결된다고 한다.

이번 일정을 더 넉넉하게 잡을 수 있었다면 부다페스트로 가서 동유럽을 돌아볼 생각도 했었다.

불과 6시간 반이면 빈이나 부다페스트에 닿을 수 있다니 공항으로의 이동과 수속 시간을 고려하면 기차 이용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역 광장 앞, 가판대를 보니 노천시장이 열리나 보다.


토미슬로브 왕 동상

중앙역 맞은편에 크로아티아의 국부로 칭해지는 토미슬로브 왕 동상이 있다.

베네치아와 헝가리 왕국 사이에서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던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의 공작이었던 토미슬로브를 중심으로,

925년 북부지역의 판노니아 공국과, 남부지역의 달마티아 공국을 통일하고 자치 왕국을 형성했다.

그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왕이었다.

토미슬라브 시대에 100,000명의 보병, 60,000명의 기병, 80척의 대형 선박, 100척의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해군 함대를 보유했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토미슬로브 광장 (자그레브 관광청 사진)
크로아티아  최초의 왕, 토미슬로브 왕 즉위식 (위키백과)

Art pavillion

동상 너머로 Art pavillion도 보인다.

1896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천년 헝가리 왕국을 기념하는 밀레니엄 전시회가 열린 후

건물의 골격이 자그레브로 옮겨졌고,

오스트리아 건축가 Fellner & Helmer에 의해 1897~1898년 사이에 건축이 진행되었다.

1898년 12월 15일, 크로아티아 살롱 (Hrvatski 살롱)이라는 현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대형 전시회로 공식적인 개관을 했다.

갤러리 면적은 총 600㎡이며 자국 내외 예술가들의 작품전 약 700회를 열었다.

2006년에 파빌리온 유리 지붕 개조, 조명 시스템이 교체되었고 이후 7 년 동안 계속 개조되어 2013년에 완료되었다는 건물은 노란색이다.

Art pavillion  (위키피디아 사진)


더 직진하니 식물원이다. 철제 담장 사이로 들여다뵈는 울창한 수목, 사이사이 꽃길, 그리고 청아한 새소리가 끌고가는 가방만 없다면 곧바로 들어가서 둘러보고 싶게 한다

도닌 그라드 지역이 박물관, 미술관, 대학교 등이 밀집해 있는 동네인가 보다.


드디어 마이마라 미술관과 대각선 위치에 있는 숙소 거리에 이르렀다.

제법 유서 깊은 느낌의 4층 건물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벽에 쓰인 주소 중에서 숙소를 찾아냈다.

안에서 열어줘야 건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누군가의 출입까지 기다릴 밖에.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서 간신히 거주인을 따라들어간 건물 안은,

영화에서 보던 고풍스러운 육중한 계단이 먼저 나타난다.

연혁만큼이나 층계참이 높아서 4층까지 가방을 끌어올리려니 숨이 찬다.

12시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서 현관에 붙여두고, 돌아 나온다.

다행히 맨 꼭대기 층이라 숙소 문 밖에 가방만 두고 나오는 일이 덜 신경 쓰인다.     


즈린예바츠 공원

점차 흐리던 날씨는 드디어 세찬 비를 뿌리는 중이다.

우산을 들고 시가지를 걷는데 잘 조경된 정원이 우중에서도 아름답다.

터키와의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크로아티아의 총독, 니콜라 슈비츠 즈린스키(Nikola Šubić Zrinski , 1508 – 1566)의 이름을 붙인 공원이다.

잔디만 있던 소시장인 이곳을, 19세기 도시공학자 밀란 레누치가 녹색 말굽모양으로 이어지는 8개의 공원을 만들었고 그 중, 이곳이 제일 북쪽에 있는 공원이라고 한다.

4월 연녹색 잎사귀에 빗방울 청량감이 더해지니, 색감이 배가된다.

즈린예바츠 (Zrinjevac ) 공원
트리에스테에서 수입했다는 플라타너스 길
공원의 화단


반 옐라치치 광장

트램 레일을 따라가니 반 옐라치치 광장에 이른다. 도시의 중심지이자 근대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광장은 17세기 오스트로-헝가리 스타일로 건설되었으며, 중앙에는 184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입을 물리친 전쟁 영웅 반 옐라치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의 영주였던 옐라치치(Josip Jelacic)는 독립을 추진하여 파리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1851년 그라데쯔 지역과 자그레브 전체를 통합하여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라 새로운 자그레브를 건설하였다.

광장은 그의 이름을 땄으며,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곳이다.

1945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왕정시대 잔재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동상이 치워지고 광장의 이름도 '공화국의 광장'이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을 인정하여,

기마상이 쳐다보는 방향만 남쪽으로 바꿔, 1991년에 광장으로 동상이 되돌아왔고, 이름도 되찾게 되었다.

1990년대 크로아티아 인들이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추진할 당시 시민들이 모인 곳이다.

반 옐라치치 동상
반 옐라치치 광장
인근해 있는 성 스테판 성당 (대성당)의 공사 중인 첨탑
만두세바츠 분수 ('자그레브'란, 메마른 이곳을 지나다 우물을 파, 병사들의 갈증을 해결한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

우리 사회도 구성원 간의 합의가 유연한 시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근래 들어 더욱 간절하다.

극단적 논리, 편향 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초래한다.

가치 창출에의 합의를 위한 부단한 인내와 노력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무이다.

분열된 국론은 국력을 키워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서양 고금의 역사는 말한다. 강한 외세보다는 내분이 파국의 원인일 수 있음을.

근자, 우리 사회의 팽배해진 극단적 배타심이, 이곳에서 갑자기 근심으로 떠오른다.


자그레브 대성당( 혹은 성 스테판 성당, St.Stephen Chapel) 파괴의 연혁

시내 어디서나 잘 보이는 성당의 두 첨탑이 가까이 다가온다.

남쪽 탑은 가림막을 드리운 채 공사 중이다.

10세기에 토미슬로브를 중심으로 크로아티아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1091년에 헝가리의 라디슬라스 1세가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수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되었다.

중부 유럽의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던 헝가리의 왕은, 자그레브를 발칸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도시로 만들고자, 1093년에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다.

( 현재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국가군의 동유럽 경계를 이룬다.

서쪽과 남쪽 국가들 대부분은 동방정교회와 이슬람교를 믿는다.)

당시 자그레브의 서쪽 그라데쯔(Gradec) 지역은 상인, 농부가 거주하도록 했고,

동부의 카프톨(Kaptol) 지역에는 성직자 숙소와 대규모 성당을 세웠다.

1102년 완공, 1217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이 성당은 높이 77m, 넓이 46.2m이고

두 개의 첨탑 중,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이다.

외관은 로마네스크의 과도기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동군연합'(크로아티아 총독이 헝가리 국왕 역할 대신)으로 1102~1526년까지 헝가리 지배 하에 있었던 관계로,

몽골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피신해 온 헝가리왕 벨라4세를 쫓던 몽골군에 의해

1242년 대성당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후 1264년부터 20년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복구했으나,

17세기에 발생한 2번의 화재로 다시 손상되어, 17세기 중반까지 복구했다

그러나 또 다시 1880년 대지진으로 인하여 파손되었고,

현재 모습은 중세의 원형을 복원하여 1899년에 완공한 것이다.

첨탑 높이가 1m 차이 나는 것은 지진의 여파라고 한다.


(그리고 2020년 지진 역시 대성당을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성당 정문 아치 장식이 너무나 정교하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제단, 신고딕 양식의 제단 등이 있고 성당에만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이 되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란 찬사를 듣는다는 성당이다. 5천명 수용이란 규모도 놀랍다.

관광객들 표정에서 경외심이 읽힌다.

성당 앞 광장에 있는 성모 마리아 상, 그 밑의 4명의 수호성인들,

그리고 물줄기는 뿜어 나오지 않지만 석주와 분수대도 감탄을 부른다.


대성당
성당 내부
5천 명 수용 가능한 성당 내부
맨 위 중앙의 예수님과 왼쪽 성인 스태핀, 오른쪽 성인 라디 슬라우스 조각상
아치 중앙은 천국에서 하느님과 에수님의 대화 모습
왼쪽 성인 키릴, 조지, 바바라 상/오른쪽은 카타리나, 플로리안, 메토디오스 성인
성모 승천 상 (자그레브 관광청 사진)
믿음, 소망 , 순결, 겸손을 상징하는 천사들 (자그레브 관광청 사진)
대성당 앞 광장
왼쪽 시계는 1880년 대지진으로 성당이 무너진 시각 7시3분이며,  무너진 첨탑/ 오른쪽 1901년 새로 지은 첨탑
 성당 연혁



안타깝게도 2020322 자그레브 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자그레브 대성당의 첨탑 2개 중 하나의 일부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이 지진은 1880지진 이후 자그레브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며 약 2만 6천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돌라트 시장 입구에서 바라본 성당

돌라트 재래시장

성당 사진을 찍자니 탑이 너무 높아서 뒷걸음친 곳이 돌라트 재래시장 입구다.

싱싱한 야채, 과일, 유제품, 잼 등 농산물과 함께 구석 어시장에는 각종 어패류가 가득하다.

늘 그렇지만 시장만 오면 구매욕이 맹렬해진다.

숙소 문 밖에 두고 나올 만큼, 12일간 여행한 가방 속에는 딱히 중요한 물건이 없는데,

현지의 식품은 이것저것 맛보고 싶은 게 많기도 하다.

과일과 연어, 꿀, 잼 몇 개를 사들고 아쉬운 장보기를 끝낸다.

돌라트 시장

시간이 거의 12시가 되어가니 일단 숙소 체크인을 하기 위해 숙소로 향한다.

어디든 걸어 다닐만한 아담한 이 도시는,

길도 대체로 바둑판 모양의 직선이라, 숙소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낼 수 있다.

거리의 쇼 윈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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