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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찌민 4:비운의 역사 서린 통일궁 변천사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과 세계가 지켜 본 베트남 역사의 현장 통일궁

by yo Lee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행 28번 버스

1월인데도 습도가 높은 이 도시는 좌우간 너무 덥다. 이른 시간에 숙소를 나선다. 28번 버스를 타고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 (BAO TANG PHU NU NAM BO)을 먼저 갔다가 통일궁으로 갈 작정이다. 분명히 지도에서 28번 버스 정류장 위치를 확인하고 나왔는데 정류장이 안보인다.

헤매다 보니 우회전용 한 차선을 건너야 정류장이 있다. 한가운데 있는 정류장 말고 차선 하나 건너는 정류장이라 낯설다.

행선지를 묻는 차장과, 운전사에게 여성박물관 사진과 현지어로 쓴 주소를 들이미니 자기네끼리 뭐라고 하더니 요금을 받는다.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알수 없지만 큰 박물관이니 알 것이라 지레 짐작( 것이 실수였다.)

버스 이동 중 내내, 폰에 위치 표시해둔 맵스 미를 들여다보았다.

거의 왔다 싶어 차장에게 버스 창너머 건물을 가리키며 ‘이 건물이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주춤하는 사이에 버스는 박물관 정류장을 통과해버렸다.

다음 정거장에 내리려는데, 한참을 달리더니 급기야 강을 건너버린다.

차장과 나를 번갈아보는 버스 안 승객들 표정이 미묘하다.


규모가 제법 큰 시장 앞에 내려서니, 길 건너 반대 방향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 거리 상점이 하도 복잡해서 찾을수가 없다.

방금 함께 내린 모녀가,

내 팔을 붙잡고 길 건너편 정류장에 데려다준다. 분주한 이 거리 횡단이 이방인에게 위험해 보인 모양이다.

만국 공통어, 웃음으로 마음을 교환하며 작별한다.

28번 버스를 타고 거슬러 가는데 이번에는 버스 정류장이 엉뚱하다. 노선이 살짝 달라지는 구간인 모양.

무려 30분여를 걸어서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에 도착했다.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을 보며 우리나라 여성 박물관 주소를 묻다.

입구에 도착하니 방문자 카드를 준다. 목에 매고 전람실로 들어섰다.

건물 입구 전시실에는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의 사진과 기사, 그들의 소지품, 그 시대 옷가지,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특히 외국인이 많이 찾는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베트남의 지난한 근세사가 그대로 여성들의 삶 안에 배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베트남 여성 박물관은 베트남 여성 연합에 의해 1987년에 설립되었고, 1995년에 개관했다. 그 후 정부와 베트남 여성 연합, (영)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 리모델링을 2006년에 시작해 2010년 전시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전시관 구성은 남베트남 여성 복장을 포함하는 각기 다른 10가지의 화랑이 있고 31,369개의 물품이 전시되어있다. 전시품들은 소재별로 나누어져 24개의 컬렉션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중 6개의 컬렉션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진귀하고 독특한 소재와 디자인이 포함된다. 또한 gender박물관으로 남녀평등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11,000권의 다양한 여성 관련 서적이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현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박물관 홈페이지 안내글이다.

여성 박물관의 전시는 3개의 테마로 되어 있다. 가정에서의 여성/역사 속의 여성/여성 패션이다.

이 중,

‘역사 속 여성’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미국 전쟁(베트남 전쟁)에서의 여성의 역할, 일상생활, 공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독립 활동에 참여하여 투옥, 고문당한 여성들, 전쟁터와 후방에서 의료활동과 연락책 등 기타의 활동으로 기여한 여성들의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진즉에 이런 여성박물관이 세워져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어야 했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는 알아도 우리의 정신대 차출이나 만주의 일본 731부대 마루타 실험 대상이었던 일은 후대들이 잘 모른다. 실체적 접근 대신 ‘정치적 이슈’로만 전락시킴은 누구의 책임인지?

내 어려서 듣던 할머니 말씀, “정신대 끌려갈까 봐 서둘러 결혼들을 빨리 시켰지. 신랑 얼굴도 안 보고 시집들 갔어.” 그때 놀라움 아직도 나는 생생한데...


다소 무거운 기분으로 박물관을 나왔다.

1.5km 떨어진 통일궁 가는 길은 서너 블럭 직진하면 된다. 가는 길에 영화 '연인'의 작가가 다닌 레 뀌 동 고등학교를 지난다.

기와지붕을 얹고 선 정문은 예전 그대로인 모양이다. 1875년 개교하여 140년이 넘는 유서깊은 학교라고 한다.

레뀌동 고등학교 정문
통일궁 건너편 후문

후문에서 길 건너면 바로 통일궁이다.

벽면을 온통 둘러막아 놓은 걸 보니 공사중 모양이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니 행사용 의자와 무대가 뜰 가득 설치되어 있다.


드디어 나는 베트남 근세사의 주요 무대 현장에 와 있다.


역사의 현장, 통일궁의 변천사

- 노로돔 궁전 시대:

‘1858년 프랑스는 다낭을 공격하기 위해 불을 지피고 베트남에 대한 침략 전쟁을 시작했다. 1867년 프랑스 인은 코친차이나 (Bien Hoa, Gia Dinh, Dinh Tuong, Vinh Long, An Giang 및 Ha Tien) 대륙을 점령했다. 1868년 프랑스 정부는 사이공 중앙에 코친차이나 주지사의 저택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1868년 2월 23일 시작되어 1871년 베트남 남부 라그 라디 에르 (Lagradìere) 프랑스 총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통일궁 홈페이지의 설명글이다.
노로돔 궁전
1927년 주지사의 코친차이나 궁전 사무국실

이 궁은 코친차이나의 지사 및 코친차이나 프랑스 총독이 사용해왔다. 이어서 2차 대전 후에도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프랑스와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인 비엣민이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치른다.

1954. 9. 8 일 프랑스 사령관, 폴 엘리 (Paul Ely) 장군과 사이공 대표 Ngo Dinh Diem 궁 양도식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와의 국경 부분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 이후,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 1954 년 9월 7일 프랑스 령 인도 차이나를 종식하고 폴 엘리 (Paul Ely) 고등 판무관이 새로운 남베트남 정부에 이 궁을 넘겨준다.


- 독립 궁전 시대: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 남북으로 분단시켰다. 약속한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4년 응오딘 지엠의 쿠데타로 왕조는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1955년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성립으로 초대 대통령 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 은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재와 종교적 편향을 견디지 못한 승려들의 항거로 촉발된 군부 쿠테타가 1962년 2월 27일 고 딘 디엠 자신이 직접 임명한 장군, Nguyễn Văn Cử 와 Phôm Phú Quốc가 AD6 항공기 두 대를 타고 곡사포로 독립궁을 공격하며 쳐들어왔다. 그들은 노로돔 궁전에 폭탄을 떨어 뜨려 건물의 왼쪽 날개 전체를 파괴했다.


마담 누: Diệm 대통령은 신부가 되려던 신앙심으로 독신이었다. 의전상 등의 이유로 정보부장이던 동생 응오딘 누의 부인이던 마담 누가 퍼스트레이디로 결정되었다. 이후 그녀는 공산주의자에게 친정 오빠 두 명이 살해당한 원망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면서 반불교, 반공산주의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축재, 공무원 인사, 미국의 원조 물자 배분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용녀'(Dragon Lady)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불교활동 저지에 대한 반감으로 스님들의 항거가 이어지고 틱꽝득스님의 분신으로 촉발된 항거는 결국 남편과 대통령의 처형으로 끝났다. 딸과 외국 순회 중이던 그녀는 영구 귀국 불가 통보를 받고 유럽을 전전하다 로마에 정착해 2011년 4월에 숨졌다.


1962 년 2 월 27 일 남베트남 전투조종사들의 쿠테타로 왼쪽이 파괴된 노로돔 궁을 마담 누 (Madame Nhu)가 돌아보고 있다.

1963년 11월 1일 쿠데타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남베트남의 군 고위 장성들이 체포되고, 대통령궁을 공격해 경호 부대와 전투를 치렀다. 미국으로의 망명을 거부하던 고 딘 디엠은 11월 2일 새벽 쿠데타 세력이 총공세를 펼치는 사이 동생 응오 딘 누와 함께 비상 통로를 통해 중국인 거주 지역인 쩌런으로 도주했으나 총상을 입고 이동되던 중 쿠데타군에 의해 동생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배후로, 지엠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동정심이 고조되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가 같은 해 중앙정보국(CIA)과 남베트남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지엠 정권을 붕괴시켰다고 한다.


1963 년 11 월 2 일 Ngo Dinh Diem을 전복시킨 Dinh Gia Long

-남베트남 대통령의 집무 공간 및 관저 :

1966년에 남베트남의 건축가 응오 비엣 투에 의해 현대건축으로 새롭게 재건하였다.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종결까지는 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 집무 공간 및 관저로서 사용되었다. 3명의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 (완성 전 - 1975년 4월 21일)/ 쩐 반 흥(1975년 4월 21일 ~ 4월 28일)/ 즈엉 반 민 (1975년 4월 28일 ~ 4월 30일)이 사용했으며, 이들은 초대 대총령 응오 딘 지엠이 임명했던 군 장성들로서 민심이 돌아선 정권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1975년 4월 8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노스럽 F-5 프리덤 파이터로 폭격을 했다. 같은 해 4월 30일의 사이공 시내에 돌입한 북베트남군의 전차가 당시의 대통령 집무 공간이었던 이 건물의 울타리를 파괴하고 돌입하였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영상은 “일 개의 국가가 소멸하는 순간”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4월 30일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전쟁 승리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현재 앞뜰에 전시된 전차가 바로 그 전차라고 한다.


1975년 4월 30일 담을 뚫고 진격하는 북베트남의 탱크. 현재 통일궁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 통일궁: 1975년 4월 30일이 멈춘 곳

베트남 전쟁은 종료되었고,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 혁명정부가 사이공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6년에 공산주의 통일국가인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한 후에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것을 기념하여 ‘통일 회장’으로 개명하였다.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 공간 당시 1975년 4월 30일 시점 상태로 보존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건물 옥상에는 함락 당시 버려진 미군 헬기가 전시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대통령 집무실, 내각실, 회의실, 접견실 등 100여 개의 방들이 있으며, 지하 벙커에는 사령실, 암호 해독실 등 당시 극비 군사 기지로 사용된 흔적도 볼 수 있다.

접견실

남베트남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물도 있고 지하에는 지하벙커와 남베트남 대통령의 의전용 벤츠가 있다.

남과 북이 전쟁으로 대치하던 시절, 초단기 집권 대통령들의 불안전한 상황을 상상해본다.

전쟁 당시 통일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주는 15분짜리 영상도 있다. 1층의 여러 복도와 방들을 지나면 뒤편의 옛 대통령 관저로 이어지는데 예전의 대통령의 업무와 관련한 방들을 볼 수 있다.

1961년 사이공 거리

간이의자, 방송 장비, 대형 무대가 통일궁의 뜰을 꽉 채웠다. 스태프들이 우중에도 분주한 걸로 보아 거대 행사 일정이 촉박한 모양이다.

소나기가 멈추지 않고 내린다. 이곳의 영락 따라 산화한 영혼들이 아직도 원망으로 서성거리는 것일까?

마당 한편 탱크와 파괴된 전투기는 왜 몇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그 앞에 스러져갔을 수많은 병사들은 이념의 희생양인가 아니면 민족의 숙명적 제물인가? 창창한 나이에 선택이 아닌 의무로 군인 되어 숨져간 많은 사람들, 민주주의라는 혹은 민족주의 라는 이름을 둘러쓴 이념 수호를 위해 몸 바친 양쪽의 열사들, 철저히 피동적 숙명으로 내몰린 양민들, 그들 모두의 희생에 나는 진심의 애도를 바친다.


회랑에서 내려다보는 정원은, 열대우림의 아름드리 정원목이 제법 높다. 옛 노로돔 사진으로 라면 저 남쪽은 무성한 숲이어야 하는데 오늘날은 공원으로 되어있다. 테니스 코트도 한 편에 있다. 지금은 평화시대 인 것이다.

정치라는 부질없는 흥망성쇠 따라 명멸해간 숱한 인간들의 덧없는 생을 이 터에서 지켜보았을 나무들에 경외감이 인다. 이들은 앞으로 또 어떤 역사를 보게 될 것인가?

정원사는 그새 일을 마쳤고, 푸르른 나무도 가지 사이로 슬쩍슬쩍 내미는 햇살에 나른한 몸을 맡기며 하루해를 넘기고 있다.


모든 인간은 유한하기에,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저 나무들처럼, 저 꽃들처럼, 그리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 그렇게 서로 보듬고 살다 가면 안 될까?

호찌민 마지막 날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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