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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찌민 3:미군 헬기의 사이공 마지막 이륙 장소

사이공 colonial 건물들과 베트남 최후의 날, 탈출 장소를 보며

by yo Lee

6.25처럼,

쉬이 잊혀지는 전쟁의 상흔

인근의 사이공 우체국에 당도하지만 구경보다는 일단 쉬고 싶다.

우체국 바로 옆 스낵 식당에 들어간다.

한국계 회사 유니폼의 젊은 여성들이 막 식사를 끝내서 일어나는 중이고, 한쪽에선 중학생들이 치킨을 앞에 놓고 종알거린다.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다.

유리창 한장 사이, 밖은 내리쬐는 햇볕에 숨이 막히는데 안쪽은 서늘하니, 방금 더위가 금세 잊힌다.


불과 몇년 전, 전쟁의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부모세대의 상흔이 자녀 세대들에게 단절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시절 이야기 하도 들어서 이제는 제가 외워요. 뭐하러 지난 얘기 자꾸 하세요?"

그랬었다!

머물러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들으려고 하면 체감되는 것을, 왜 우리는 귀 막아가며, 빨리 잊고만 싶은 것일까?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세대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후세대 무관심이, 뼈 아픈 역사 전달의 부도체가 되었다.


어디 전쟁 뿐인가?

'그때 미처 몰랐다'는 말로는,

핏줄이, 친구가, 이웃이 혹은 동세대가 겪는 아픔을 방임한 것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을 때서야 비로소 절절해지는 통한은, 오롯이 내 몫이더라...'


사이공의 프랑스 colonial 건물들

1843년 프랑스는 베트남 개입을 시작으로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다. 베트남 전역이 코친차이나로 불리어졌고, 이 시기 프랑스 건축가들에 의해 식민지 양식의 건축물들이 지어진다.

colonial style이다.

이 양식은 식민지에서 모국의 건축을 본뜨지만, 풍토, 재료, 기술 수준, 생활수준의 차이에 의해 모국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특색이나 내용을 띈다.

사이공이 "동아시아의 진주"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인 통일궁, 인민위원회 청사, 호찌민 시립 극장, 사이공 중앙 우체국, 노트르담 성당 등이 그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옛 사이공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당시의 도시 건설이 계획적이었음을 알수 있다.

베트남 옛 모습에 관심이 있다면 HISTORIC VIETNAM (http://www.historicvietnam.com)를 참조. 이 사이트 운영자 팀 돌링은 ‘베트남 철도와 전차, Huế 탐험, H Chí Minh City 탐험 및 북서부와 북동부 베트남의 가이드 북을 포함한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역사적 건물이나 풍경과 관련한 당시 인물들의 여행기, 편지, 기사 등을 토대로 그 시절 문화와 풍습, 시사적 모습과 현상으로 우리를 회귀시켜준다. 프랑스가 계획, 설계한 '극동의 진주', 사이공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콜로니얼 건축물 진행 과정과, 전성기, 그곳을 누비던 사람들의 생생한 느낌을 수록해놓았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현대건축에 밀려 철거 위협에 직면하여 '유산가치 보존' 이란 기치로 위태롭게 버티는듯 하다
식민지 시절 향수를 만끽할 프랑스인뿐 아니라, 여늬 여행자들도 예전 풍경과 그림들이 수록된 이 사이트를 보며 타임머신 승차로 지금 자신이 걷고있는 거리를 탐색케 하는 흥미 유발 사이트이다. 최소한 7~80년 전쯤 지어진 유서깊은 이런 건물들은 쇄락해져서 반쯤 헐려 팔잘린 모습이거나, 덧대어 지은 건물 뒤에 가려져 있는 통에 지붕이나 창틀 형태로 '숨은 그림' 찾는 재미를 준다. 사이공에서만 가능한 관광인 듯하다.


사이공 우체국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 중 최고로 꼽히는 대표적인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1886년부터 건축가 외 기스트 앙리 빌드 외와 알프레드 폴 홍스의 지도 아래 지어졌고, 1891년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우편 · 전신 시설로 완성했다.

현재에도 보통 우편 · 통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란색 아치형 외관의 정문 상부는 아름다운 조각물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 시계가 있다. 노랑 건물과 흰색의 정교한 조각물과 청록색 창틀의 색감이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서니 돔 천정에 이어 오르세 미술관처럼 원기둥을 반으로 잘라 엎은 듯한 아치형 천정이다.

전면 중앙에 호찌민 사진이 걸려 있다. 벽에는 손으로 그린 정교한 지도가 2장 마주 보고 있는데 우체국이 설치되고 바로 만들어진 지도라고 한다. 왼쪽 지도는 1892년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전신 선도이고, 오른쪽 지도는 1892년 사이공과 그 주변 지역도라고 한다. 좌우 창구 앞에 엎드려 저마다 엽서를 적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도 때문이지 그 밑의 유럽 도시별 현지시간을 알리는 시계들 때문인지 엽서 쓰기를 마치면 이들은 곧 어딘가로 먼 여정을 떠나갈 출발지 플랫폼 분위기이다.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의 옛 비밀경찰본부

우체국 옆에 노트르담 성당이다.

1863년부터 1880년에 걸쳐 건설되었는데 죠르쥬 헤르미테가 디자인과 건축을 맡았다고 한다. 1880년 4월 11일, 낙성식을 하였다. 건축 당시에도 자재를 프랑스에서 가져다 썼다는데 근래의 보수 재료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가져와 사용한다고 한다. 1962년에 교구장의 주교좌가 있는 대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의 토대는 성당 무게의 10배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호찌민 시 노트르담 성당의 높이 60m의 쌍둥이 첨탑이 성당 신축 당시에는 얼마나 대단한 규모와 높이였을지 짐작된다. 완공된 후 15년이 지난 뒤에야 두 첨탑은 증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축 초기의 성당 그림에는 첨탑이 없다.(historicvietnam.com/2014/07)

대대적인 보수인 듯, 가림막과 비계 때문에 성당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더구나 스트리트 뷰로 볼 때 없던 울타리조차 생겨서 건물 밖에서 빙 둘러본들 보이는 게 없어 아쉽다. 마침 미사 중이라 들어가 보니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산만하다.

두 첨탑 사이 본관 건물을 차지하는 커다란 장미 창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니 성모 마리아 상이 넓은 정원과 광장 한가운데 서있다. 광장에는 지금 막 관광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떼 지어 성당과 우체국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정차하기 편한지 관광버스가 많다.

다시 마리아 상을 등지고 서서 동코이 거리를 바라보노라면 길 건너 왼쪽에 문화 스포츠 및 관광국 건물(Department of Culture, Sport Ho Chi Minh City)이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비밀경찰본부였던 이 곳은 1917년에 건설 1933년에 현재의 2층짜리 건물로 완성되었다. 이 건물 지하 비밀 터널은 정치범과 1941년 호찌민이 결성한 반제국주의 활동 단체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성당과 마주 보고 있어 ‘천당과 지옥’으로 비견되었다고도.

지금은 그저 낮의 나른한 기운에 휩싸여 관광객과 시민들의 무심한 통행로일 뿐이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의 장소였을지 이 거리를 지나는 자국민들 중 그 역사를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길을 건너서 문화 스포츠 관광국을 왼편에 끼고 동코이 거리를 따라 걸으면 이 블록의 맨 마지막 코너를 끼고 지어진 5층 건물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역사적 사진을 남긴 건물이다. 남베트남의 패망 하루 전, 옥상에 마지막 헬기가 내렸던 사진이다.


'사이공 최후의 날' 사진 속의 그 건물

1975년 4월 29일 사이공 마지막 함락 하루 전 사람들이 헬기를 타고 탈출하려고 옥상의 계단을 오르며 줄 서 있는 모습이 한 기자에 의해 찍혀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이공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당시 미 대사관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 건물은 대사관 건물로부터 800여 m 떨어져 있는 CIA 요원 가족들이 거주하던 , 기아 롱 거리 22번지에 있는 아파트였다.

헬리콥터는 위험하게도 그 건물의 좁은 지붕 위에 착륙해 그곳에 모이도록 통보된 30명의 낙오자들을 태우기로 돼 있었다. 그 구출 광경의 사진은 사이공 함락의 상징이 됐다. 모두를 태우기엔 너무 작아 보이는 헬리콥터를 향해 사람들이 무너질 것 같은 계단을 줄지어 올라간다. 그리고 마지막 비행으로 헬리콥터는 이곳을 떠나간다.

사이공 최후의 날 : 5층 건물 옥상의 좁은 곳에 내려앉은 헬기가 마지막 30인을 태우고 있는 모습. 일간지 발췌

미군들은 4월 29일 23:30부터 장비를 폭파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는 폭약에 지연신관을 장착한 후 4월 30일 07:30에 밖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가스탄을 던지며 문을 폐쇄하고 07:53에 옥상에서 이륙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은 이제 사이공을 떠났다. 잠시 후 미 대사관 건물 내부는 폭파되었다.

4월 29일, 30일 양일 18시간 동안 헬기 70대, 630 쇼티로 미국인 1,373명, 남베트남인 5,595명, 제3 국인 83명을 철수시킴으로써 사상 최대 규모의 헬기 철수 작전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4월 중 미국인 6,763명, 남베트남인과 제3 국 인을 포함하여 45,125명, 거룻배 어선을 이용하여 미 함정에 탑승한 6,000여 명이 남베트남을 탈출하였다. 기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비밀리에 수송된 인원도 4,000명 가까이 되어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탈출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6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주베트남 한국대사 이대용(李大鎔) 외 140명의 한국인이 탑승을 하지 못하였고 이 대사는 이후 5년 동안 북베트남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대사의 처지가 그러했다면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우리가 가히 그들의 이후의 삶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헬기에 타려는 베트남인을 주먹질로 막는 모습:일간지 발췌

남베트남의 수십, 수백만은 병사여서, 공무원이어서, 파병군인들과의 친분 때문에, 베트콩이 아니어서 등 여러 이유로 베트콩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거나, 보트 피플이 되거나, 간신히 망명하거나 그 외 여러 방식으로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병군인들의 아이를 낳은 현지 여인들의 삶 역시 더없이 비참했다.

이 코너의 5층 건물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여전히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날의 역사를 깊이 묻어두고 있는 듯하다.


호찌민시 시립박물관

시립 박물관

한참을 걷다 보니 나무의 높이가 무려 10m는 조이 됨직한 거대한 나무가 보인다. 그 맞은편 담장 너머에 비행기와 전차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비행기는 1975년 남베트남 함락된 날, 대통령궁 폭격에 사용된 전투기로 북베트남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기라고 한다. 이 거리에는 마당에 헬기, 대포 혹은 전쟁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 최소한 4곳 이상이다.

이 건물은 냐롱(용의 집)이라고도 부른다. 쟈롱 궁의 건설은 프랑스 건축가 알프레드 폴홍스 설계로 남베트남에서의 물산과 상품을 전시하고, 박람회용으로 1885년에 시작되어 189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다가 코친차이나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32년 6월 2일 프랑스 정부는 인도차이나를 재건한 후 이 건물을 베트남국 임시 정부에 주어서 본부를 설립하게 했다. 이후 고급스러운 궁전으로 변모하여 베트남 총리의 공식 거주지로 이용되었던 이력이 있다.

현재는 시립박물관이다. 전시 자료 중, 학생들의 희생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던 1950년 1월 9일, 베트남 독립을 지지하며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짠반 우 총리는 경찰에게 진압을 명령, 150명의 사람들을 체포,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중 페트러스끼 고등학교에서 온 학생인 짠반 언 1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1950년 1월 12일 짠반언의 장례식에는 25,000명의 참석자가 있었다. 사진 속 내용이다.

호찌민이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사용했던 물건들, 시기 별 독립을 위해 투쟁한 영웅들을 묘사한 그림과 관련 물들도 있다. 건물 외벽에는 벽에 나있는 총자국이 많이 보인다.

이 건물이 평화시대의 거주지로 이용되었다면 참 근사한 저택이었음직하다. 박물관 앞 길 건너 거대한 나무가 그 아래를 지나는 승용차를 미니어처처럼 보이게 한다.

시립박물관 앞 거리의 거대한 나무

자카르타 여성 사업가

기인 하루 여정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들어섰다. 사이공에서 유일하게 나를 누일 수 있도록 허락된 공간은 좁은 침대 한 칸이다.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옆 침대의 주인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눈다. 자카르타에서 사업을 한다는 47세 여성이었다. 한국인을 직원으로 고용한 인연으로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는데서 대화가 시작됐다. 한국의 음식, 한국인 젊은 직원의 부지런한 근무태도, 한국 방문 등을 두루 든다. 그리고 서로의 해외 관광경험을 얘기하다가 급기야 이 숙소의 호스트에 대한 화제로 이어졌다. 그녀도 뭔가 쌓인 게 많았던지 둘 다 호스트에 대한 느낌이 같았다. 곰삭던 불평을 털어내니 마음이 좀 풀린다. 아니, 홀로 여행 며칠 째라서 대화에 굶주렸는지도 모른다.

침대 모서리에 서서 주고받은 대화만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녀가 같이 밖으로 나가기를 권한다. 오늘 밤이 그녀의 호찌민 마지막 밤이고 조금 후, 새벽 1시에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저녁도 먹고 차라도 한잔 하러 같이 나가자는 것이다.

모처럼 함께 할 사람을 만나게 된 좋은 기회였지만 아까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데다 왼 종일 걷다 보니 발이 무척이나 아파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워하며 그녀 혼자 호찌민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러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 그녀는 공항에 간다며 챙겨놓은 가방을 끌고 나선다

배웅하는 나와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뺨을 비비며 진심을 담아 인사를 나눴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여행 많이 많이 다니세요.” 한다.

나도 그녀의 사업이 잘 되기를 기원한다.

홀로 여행자들끼리의 공감대가 짧은 만남, 이별의 긴 여운을 만든다.

아무쪼록 그녀가 탄 ‘밤 비행기’가 무사히 잘 도착하길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영화 '연인' 그리고 숙소 호스트

호스트는 눈 마주치는 서양인들을 향해 “Hi, brother!"를 외치며 엄청 호의를 보인다. 아침마다 식당에서 그는 이중적 면모를 겁도 없이 드러낸다. 동양인에게는 싸한 태도, 서양인에겐 애처로운 수준의 상냥함!

시설도 청결하고 값도 저렴하며 스탭들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그럼에도 호스트는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


영화 ‘연인’과 ‘인도차이나’가 떠오른다.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다.

‘연인’은 1920년대 말 베트남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프랑스인 17세 소녀와, 우연히 만난 32세의 중국인 남자의 이야기이다. 인종적인 편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받지도 스스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1992년 개봉 영화이다.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가 사이공에서 1929년에서 1931년 고등학교 1, 2학년을 다니던 Lycée Chasseloup Laubat 학교는 현재의 레 뀌 돈 고등학교이다. 내일 가볼 통일궁에서 길만 건너면 된다. 이 학교의 홈페이지 사진 속, 학교 가운데 뜰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의 오래된 나무가 그대로 있다. 촬영을 어디서 했는지 모르지만 분위기는 거의 같다.

그리고 영화의 남자 주인공 중국인의 집은 사이공에서 약 140km 떨어진 사덱의 메콩강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Huynh Thuy old house라고 인터넷 지도에 표기되어 있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란다.

그 집에는 연인의 실제 두 주인공 사진과 함께 남자 주인공의 부인과 가족 사진들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연인의 출연 배우 제인 마치의 사진도 함께.

영화의 배경, 인종간 괴리감으로 관람 내내 속 불편하던 기억이 엉뚱한 상황에서 불려나온다.

저 호스트는,

자신의 선조들이 100년이나 겪어야만 했던 프랑스 식민으로서의 인종차별 그새 잊은 불찰,

게 될날이 있기나 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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