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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찌민 2:월남전쟁 박물관의 한국 할아버지 눈물

베트남 전쟁 사진 속의 어린이, 부녀자들 시선에 가슴이 아린다.

by yo Lee

호찌민 2일째 : 안녕을 속삭이고 떠나는 여행자들

한밤중 입실객 중국인 3명.

6인실 혼자 쓰게 되어 좋아했는데 산통 깨는 게 하필 시끄러운 중국인이라니...

그런데,

그녀들은 아주 잠깐 두선거리더니 거짓말처럼 '동작 그만' 모드,

이어 취침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른 새벽,

커튼 너머로 감지되는 그녀들의 움직임은

역시 조용, 신속하기가 영화 속 첩보원 같다.

몇 분후,

가방을 끌며 차례로 나가는가 싶더니,

맨 마지막 여자의 속삭임,

“Good bye".

"... ?...!"

그 말의 대상은 혼자 남은 나,

얼굴도 못 본...


잘칵, 닫히는 문소리,

멀어지는 그녀들의 가방 끄는 소리가,

해일되어 밀려든다.

혼자라서 자유롭고, 혼자라서 외로운 여행인 것을 이 새벽, 뜬금없이 각인한다.


이른 아침을 먹고 4번 버스 타러 큰길로 나섰다.

북동쪽 식물원에 내려, 남서쪽으로 식물원, 역사박물관, 전쟁 박물관, 호찌민시 우체국 순서로 이동할 예정이다.

지난밤 축제의 흔적은 없다.

해가 아직 다 솟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그새 더운 공기로 팽창되어 있다.

동서양 막론하고 대중교통에는 여행자의 착오를 덜어 주려는 인정 있는 분들이 계신다. 덕분에 정류장 지나치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식물원 후문에 내리면 역사박물관과의 동선 겹침이 줄어든다.


호찌민 식, 동물원은 유서 깊은 곳

식물원의 역사는 150년이 넘고, 전시된 식물의 종류와 가치도 매우 높다고 한다.

프랑스군이 사이공을 점령한 지 5년 뒤, 1864년에 만들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 동물원 중 하나이며, 백여 종의 표유류와 파충류, 조류, 희귀란과 관상용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식물원을 만든 식물학자 삐에르(J.B.Louis Pierre)는 1865년에서 1877년까지 사이공에 머물면서 식물원을 관리하는 한편, 인도지나 반도의 곳곳을 방문하여 식물채집 및 식물학 연구를 하였다. 덕분에 면적 33ha(약 11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은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지나 반도의 각종 수목들까지 이곳에서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공로가 인정된 삐에르의 흉상은 식물원 정문을 들어서면 한 복판에 있다.

현재 라오스서도 보기 어려운 케시야(라오스) 소나무, 3세기 전에 일어난 향료 전쟁에 등장하던 대경목 계피나무, 샌드페이퍼 나무, 서부 아프리카 원산의 아프리칸 마호가니, 파푸아 뉴기니와 솔로몬 군도에서 볼 수 있는 부수 플럼, 스리랑카 원산의 실론 철목 등 수많은 아열대와 열대의 수목들을 볼 수 있는 식물원이다. 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에서 가져와 식재한 수많은 아열대와 열대의 수목들도 있다. 일본에서도 900여 종의 식물을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식물원은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멋진 명소 중 하나라고 평가를 받아왔지만, 베트남 전쟁 중에 파괴되어 현재 복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식물에 관심이 있다면 그 어느 곳보다도 먼저 들러야 할 곳이다.

같은 울타리 동물원에는,

드문 피그미 하마를 비롯해 코끼리, 호랑이 등의 포유류 외에도 파충류, 조류 등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새는 물론, 열대지방이라서 뱀의 종류도 다양했다.

특히 아이들이 보면 눈을 떼지 못했을 악어들이 엄청 많다. 여기저기 미동 없이 엎드려 있어서, 나무토막인 줄 알았다. 좁디좁은 사육장 안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갇힌 죄수들처럼 보여 안쓰럽다.

‘관람객과 갇힌 동물의 인과 관계는?’ 혼자 묻는다.

야간에도 개원하고,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는데 유독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많이 보여서, 따져보니 일요일이다. 시민들의 생활모습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느 나라나 자녀 출산이 적어 소공자, 소공녀가 많은가 보다. 공원 무대에는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공연이 한동안 계속되고 부모들은 자녀들의 재롱에 한껏 행복해한다. 공원 한가운데 낮은 풀에서는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드높다.

이만한 평화 누리기가 왜 그렇게나 힘든 것일까?


베트남 역사박물관 (BAO TANG LICH SU VIET NAM).

식물원 정문 바로 옆에 역사박물관이 자리한다.

1927년 2월 18일에 사망한 Holbé의 골동품들을 동양고전연구회에서 구입한 후 나라에 기증하였고 여기에 기존의 베트남과 아시아 국가의 고대 예술 수집품 유물을 더해서 보관,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 건설이 제안되었다.

1927년 11월 27일 식물원 인접 부지에다 프랑스 정부는 블랑샤르 드 라 브로스(Blanchard de la Bross)라는 박물관을 건설하였다. 이후 개명, 개축되다가, 1979년부터 사이공 국립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베트남 남부에서 최초로 설립된 박물관이다.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 Delaval가 혁신적인 동양 건축양식으로 설계, 3년(1926-1928년) 동안 건설했다.

박물관의 제1구역은 약 30만 년 전 원시 시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까지 베트남 청동기 문명을 이끌었던 동 선 문명과 캄보디아 후난 왕국을 탄생시킨 옥 에오 문명 유물까지 전시되어 있다.

제2구역은 베트남 남부 소수 종족과 주변국의 문화를 안내하고 있다. 본관 뒤편 3층은 학술 도서관으로 식민지 시기에 집필된 수많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별로 보자면, 제1실 선사시대, 제2실 철기 시대 (홍방 왕조), 제3실 중국의 지배기(독립 투쟁기), 제4실 前 리 왕조 시대, 제5실 쩐·후 왕조, 제6실 참파 문화, 제7실 오케오 문화, 제8실 아시아의 불상, 제9실 후 레 왕조 · 막 왕조, 제10실(옥외) 대포, 제11실 떠이선 왕조, 제13실 캄보디아의 석조, 제14실 아시아의 도자기, 제15실 호찌민 시 솜까이(Xóm Cải)에서 발견된 미라, 제16실 븡홍센(Vương Hồng Sển) 특별전시실, 제17실 남부의 소수민족 문화, 제18실 특별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남부의 문화적 특성을 포함하여 베트남 역사의 발전과정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웃 국가를 비롯해 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전시내용을 확대하고 있다.


박물관 회랑을 돌며 더위는 식히지만, 개관 당시 2,893개의 전시품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푸남(Phu Nam)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 중국 등 동북아시아로부터 넘어온 30,000개 이상의 고대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이 장소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관광객들 중 유물에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오래도록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기에 몰라서 다 보지 못하는 비애가 크다. ‘눈 뜬 장님’에 ‘개발에 편자’ 그런 말만 줄줄이 떠오른다. 공부 좀 하고 살았으면 좋았을 걸.

정문을 나서 큰길 건너면 ‘Ho Chi Minh Campaign Museum’ 호찌민시 전쟁박물관이다.

마당에 부서진 헬기의 잔해가 보일뿐 아무리 기웃거려도 육중한 현관문은 열릴 기미가 안 보인다. 보수 기간인가? 왜 안내 글은 없는 것인지?

돌아 나와 ‘전쟁박물관’을 향해 큰길을 따라 걸어간다.


전쟁박물관: 사진 속의 어린이, 부녀자들 시선에 가슴이 아리다

호찌민 시 박물관 가운데 가장 많은 여행자 방문지라는 이곳 이전 명칭은 "전쟁 범죄 박물관"이었다고.

뜰에 전시된 무장 전차들, 헬리콥터 전투기, 유탄 발사기, 대포 등의 무기들을 보니 잘 찾아왔다.

우리가 월남전쟁으로 알고 있는 베트남 전에 미군이 사용한 무기들이다. 실내는 전쟁 당시 미군의 정보부 청사여서 공간이 넓고 툭 트여있는 것이 여늬 장소와는 다르다.

층별로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데 전쟁 중 사용된 각종 유물과 피해자들의 옷이나 신발 소지품 그리고 사진 자료들이 있다. 유명한 '벌거벗은 네이팜탄 소녀'의 사진도 있다.

고엽제 피해에 관한 사진은 차마 오래 볼 수 없었다. 여러 형태의 기형아들과 사체 등이 전쟁의 잔혹성을 말해 주고 있다. 주검 옆에서 혹은 폭격된 건물 앞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는 민간인들의 표정에는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공포가 배어있다. 점차 강력해진 무기와 유례없는 막대한 양의 무기사용으로 민간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초유의 살상자를 냈던 전쟁의 참혹함은 상상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은 대미 항전이라 칭한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 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던 1960년과 64년 내전 중에,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19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에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는 과정을 겪어 오늘날의 베트남이 되었다.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을 퍼부었다. 그러나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 섬멸 작전 과정에서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등 화학 무기를 사용하고도 베트남인들의 끈질긴 저항 끝에 패전하였다.

이 전쟁에 파병하였던 우리나라 입장도 편치 않다. 우리나라는 1964년 1차로 1개 의무중대 및 태권도 교관단 파병을 시작으로,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전 협정이 조인된 1973까지 파병하였다고 한다.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 및 백구부대 등 1개 군단 병력을 파견하여, 1965부터 휴접 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 미군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군의 피해는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1,232명이다. 전쟁으로 사망, 부상한 군인들의 가족은 물론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후유증과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었을 수많은 젊은이들의 삶은 주목도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스러져갔을 것을 생각하면 전쟁이 남긴 피해는 너무나 크고도 깊다.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킴으로써, 미국 내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군사개입에 대한 정당성에 타격을 입었다. 이 곳은 미국의 비윤리적 도발과 행태를 고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많은 관람객들이 한숨과 통탄을 금치 못하며 전시실을 돌아보고 있다. 관광객의 2/3가 백인이며 그중 미국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한 전시실, 지도에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부대 주둔 상황이 표시된 상황판 앞에서 나이 지긋한 한국인 관광객이 함께 온 사람들에게 설명 중이다. 그 자신이 파월 국군일 때 상황이다. 듣고 있는 한국인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1992년 우리나라와 수교 후 이곳에 있던 한국군인에 관한 자료가 많이 치워졌다고 한다.

관광차 왔던 어느 한국 할아버지는 이곳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미안합니다"라고 했단다.

머나먼 이국 전쟁터에 와서 생과 사를 넘나들다보면 매 상황에 이성적일수야 있었겠는가!그래서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음에 이곳에 와서 다시 통한에 젖는 노병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는 곳, 전쟁박물관이다.


몇 해 전, 첫 번째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가이드의 얘기 중, 한국참전군인들이 이곳에서 겪은 혹은 저질렀던 일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여행 가이드는 피해자인 베트남 사람들 못지않게 가해자 역할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군인들도 역시 피해자였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과제는 베트남에 대한 우리나라의 참회 혹은 사과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니, 미국 영화 속에서나 보던 파월 미군들의 후유증이 우리 파월 군인들에게도 같은 문제였음을 미처 공유하지 못한 책임이 뒤늦게 깨달아졌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을 파월장병들의 아픔을 몰랐던 우리가 더 없이 미욱할 따름이었다. 늦게나마 그 분들께도 진심의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이 땅에서 일어난 뼈아픈 진실을 뒤로하고 나도 거리로 나섰다.

중천을 벗어난 지 한참 된 해는 가장 뜨거운 열기로 도시를 달구고 있다.

점심을 먹기엔 너무 지나쳐 버린 시간이지만, 깊은 충격이 배고픔을 상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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