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다운 면모다. 오토바이 물결 가득한 거리는 인파도 넘쳐난다. 지하철 공사임 직한 사거리 한복판 공사장엔 커다란 일본 회사 홍보판이 눈에 띈다. 동남아 여행지마다 느껴지는 그들의 경제적 팽창에 조바심이 난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인가? 2차 대전으로 동남아를 전쟁의 회오리에 몰아넣은 전범국 일본의 빨라도 너무 빠른 회귀가 마냥 거슬린다.
드디어 사이공, 아니 호찌민이다.
베트남전의 국군 파병으로 우리에겐 사이공이란 이름이 익숙하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침입으로 발발한 전쟁에 우리나라는 1965년부터 휴전 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7년간 연인원 30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고,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이 도시에 있었다.
종전 후, 1976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바뀌었다.
호찌민이란 이름엔, 극악한 공산주의자로서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괴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잔인한 베트콩과, 우리 군인의 친절을 배반한 현지 주민들의 가증할 만한 계략으로, 파월 장병들이 죽거나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것을 보았거나 들으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 참극의 원흉이 바로 북베트남의 주석이며 남쪽의 해방인민전선을 이끄는 '호지명'과 합체된다.
그러나 이번 3번째 베트남 방문으로, 우리가 몰랐던 다른 측면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호찌민(1890. 5.19~1969. 9.2)은 누구?
제1대 국가주석.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가,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20대 초반부터 노년시절까지 반평생을 반식민지 해방 투쟁을 전개하며 살았고 평생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았다.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 일본에 의해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 12. 19일~1954. 8. 1일 프랑스와 비엣민의 전쟁),
미국과의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4.8~1973.1)을 승리로 이끌어 베트남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공산주의자로서 중국 공산당, 구 소련의 공산당과 같은 노선의 그였지만, 베트남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과도 협력, 친미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는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세력 약화를 원하던 미국과 협력했고, 태평양전쟁 중 일본과의 전투 중 미국 OSS의 도움을 받았다. 북부베트남 최초의 헌법으로 1945년 9월 그가 선포한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미국이 공산주의인 그를 몰아내려는 프랑스 식민주의자의 편을 들어 원조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분단 후 남쪽에 친미 괴뢰정부, 고딘디엠 정권을 내세워 분단의 영구화를 기도하자, 적대적 관계로 치닫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그들에게 점차 유리한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가 되던 해였다.
1940년대 중반부터 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지만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화장해서 재를 3 등분하여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을 유언, 개인숭배로 이어지는 묘소 건립을 원하지 않았다.
이 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하노이, 베트남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바딘 광장에 1975년 9월 2일 지어진, 높이 21.6m, 3층짜리 그의 영묘가 있다. 중앙홀 유리관에 넣어져 영구 보존 처리된 그의 유체는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레닌 묘처럼 우상화로 민심을 통제하는 공산국가들의 공통점이다.
그럼에도 영묘 뒤편에 있는 기념관 유품을 보니, 그에의 굳은 선입견에 간극이 생긴다.
베트남의 피어린 근세사의 중심에 선 그는, 민족 간 투쟁, 반대파 숙청, 처형, 토지개혁 과정의 폭정, 보트피플 등의 참상을 불러일으킨 인물로서, 양극의 평가가 공존한다. 하지만 79세로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 자신에게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견지했던 것은 존경심이 든다.
독신이니 물려줄 자손없다 하여 유산도 없었지만,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그가 남긴 전부라고.
권력을 얻고 이익집단에 둘러싸이면 초기의 이념을 상실하고, 민중의 실상과 격리되어,부패와 폭정을 영도력 연장 수단으로 당연시하는 고금의 수많은 독재자들과사뭇 다른 그의 청빈한 생애만은, 정치 지망생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사이공과 호찌민의 차이
예전 사이공은 "프레이 노코르"라는 습지대였던 작은 어촌 마을로 몇 세기 동안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베트남 중부에서 번성하던 참파 왕국이 9세기 전성기를 맞아 메콩 북부와 이곳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참파는 쇠락했고 1623년 캄보디아의 체타 2세 국왕(재위: 1618년-1628년)은 베트남의 찐응우옌 전쟁을 피해서 온 베트남 난민들이 "프레이 노코르" 지역에 정착하도록 허용, 프레이 노코르에 세관을 짓도록 하였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의 수는 증가하였고, 캄보디아 왕국은 태국과의 전쟁으로 점차쇄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졌다. 그틈을 타서, 이 지역은 서서히 베트남화 되어 갔다.
1698년에 후에의 응우옌 왕조의 통치자들은 베트남 관리 응우옌 후 껀을 보내어 이 지역에 베트남 행정 조직을 설립케 하고, 간섭할 힘 없는 캄보디아를 이 지역에서 축출하였다. 이 사이공의 확장으로, 베트남이 현재의 국경인 남북 길이 1,650km의 기다란 형태에 근접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이 노코르는 "사이공"이 되었는데, 이곳 삼림지대에 많이 생육하고 있던 카폭 나무의 크메르 발음이라고.
1790년 프랑스인 건축가 보방이 "쟈딘 성"이라는 거대한 성을 지었는데 이것을 약 70년 후 1859년 끼 호아 전투 중에 프랑스 군이 파괴하였다. 이후 프랑스에 의해 계획, 발전된 이 도시에는, 전통적인 베트남의 건축 문화 대신 프랑스 풍의 건축물이 볼거리로 남아 있다.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에 병합되어 1862~1954년의 프랑스 보호령 코친차이나 시기와 1954~1975년 이 도시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그 이후,
북베트남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려고 통일한 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사이공과 그 교외인 지아딘(Gia Định) 성을 합쳐 호찌민의 이름으로 도시 이름을 바꾸었다. 따라서 사이공은 호찌민의 12구역 중, 중심부인 1구역 만을 지칭하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현지에서는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많이 쓰이며, 항구 이름도 그대로 사이공 항으로 유지되고 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관저였던 통일궁, 남부 의거 길 및 파스퇴르가, 노트르담 성당, 중앙 우체국, 인민위원회 등 대다수의 관광지는 1군에 몰려 있다.
오늘날 호찌민시는 서울의 3배 넓이로,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다. 하노이는 수도이고, 경제 중심도시는 이곳 호찌민이다.
숙소, 호찌민시 1구역에 발을 내딛다.
1군에 위치한 숙소는 무난히 찾아갈 수 있었다.
버스 타기 쉽고, 대부분의 관광지를 도보 이동 가능한 위치로잡았다. 6인실 여성 전용 도미토리는, 새하얀 면직 침대 시트 접히는 소리가 사각거리는 청결한 관리로 상당히 만족스럽다.
열대 사바나답게 평균 습도 78-82%에, 1월 건기임에도 26도와 32도 사이의 평균 일교차가 말해주 듯, 많이 덥다.
에어컨 켠 방 안에 계속 누워만 있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선다. 가방만 남겨두고 나간 옆 침대 이용자들은, 밤에나 보게 될 것이다.
스탭에게 인근 맛집을 추천받고 거리로 나선다.
호찌민 예술박물관
노랑과 흰색으로 건축된 이곳은 원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9년에 건축된 중국 스타일의 맨션이었다. 19세기에 사이공으로 이주한 화교 후이 본 화(Hui Bon Hoa)라는 사람이 사들여 저택으로 사용했다. 프랑스식 건축에 중국 양식이 가미되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넓은 대리석 계단, 중정을 중심으로 건너다 보이는 회랑, 발코니의 철제물 곡선이 무척 아름답다.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과 의상 촬영을 하는 대학생들이 2층 회랑에서 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개인 저택으로 사용될 당시 이 건물을 오갔을 사람들의 화려함을 상상해 본다.
전시물을 둘러보니 1층은 모던 아트 갤러리로 현지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3번째 방문으로 조금은 익숙해진 베트남의 자연경관을 그린 그들의 그림이 친근하기조차 하다.
2층 전시실에는 20세기 화가들의 그림이라는데 걔중에는 정치적 색채가 묻어나는 작품들도 보인다. 3층은 유물들과 참(Cham) 왕국의 예술품들이 전시돼있지만 사전 공부가 부족해서 간단히 돌아본다.
박물관 정면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시내는 여전히 오토바이의 물결에 잠겨있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별실 전시실이 또 있는데 건물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고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돌아보느라 피곤해지기도 했고 박물관 분위기를 느끼기에 좋을 구내 카페로 들어간다.
구내 카페 야외 좌석
베트남의 다른 물가에 비하면 좀 비싼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인근 거리로 나섰다. 건물에 하나씩 켜지는 노란색 등불이 이국의 밤에 대한 흥미를 지핀다. 어둑해진 시간에 걷는, 대로 아닌 이면도로의 좁은 길은, 현지인들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호찌민 거리 붉은 물결, 베트남 축구
다시 거리로 나와 벤탄 시장으로 향하는데 팜 응우 라오 거리가 함성과 인파로 가득 차 있다.
축구 경기 응원 인파
며칠 전 나짱에서의 경기를 이겨 오늘은 결승전이 있던 날이다. 오후 5시에 시작된 경기는 1대 1 동점이다가 연장 후반 종료 1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내줘 아쉬운 1-2의 패배로 결국 준우승을 차지한 날이지만 국제 축구연맹(FIFA) 랭킹 112위로, 축구 부진 아시아에서조차 낮은 순위이던 베트남 축구의 역사적인 날이다.
길을 지나던 외국인을 포함한 시민들 모두가 이 환호의 대열에 합류, 외국인 관광객들도 깃발을 나눠 흔들고 천을 두르며 경적 소리에 맞춰 춤추고 소리치며 마음을 합한다. 각종 경적으로 주고받는 행진대의 무언의 협응은 그칠 줄 모른다. 벤탄 시장 앞을 통과해야 숙소로 돌아가는데,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갈 수가 없다.
밤 새도록 이어지는 함성이, 숙소 창문 새로 비집어 들어오는 가운데, 나는 고단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