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의 마지마 일정 차이나 타운의 캄풍 클링 모스크와 쳉 훈 텡 사원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씨이고 이름은 삼보(三保)였다. 윈난성 출신으로 마 씨는 이슬람의 후손임을 나타내 주는 성씨이다.그의 선조는 칭기즈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때 윈난성 개발에 공을 세운 색목인 정치가 사이드 아잘 샴스 앗딘의 후손이다. (색목인: 원나라 때 위구르, 탕구트, 사라센인 등 몽골인 이외의 비 중국 문화 민족으로 서방계 제국인, 즉 서역인의 일괄 호칭)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원나라의 치하의 윈난성을 공격할 때, 소년이었던 정화는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으로 당시 연왕(燕王)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의 제위 찬탈 시 공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 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점이 후에 대원정을 대비한 영락제가 지휘관 발탁을 염두에 둔 이유라고 한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는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현재의 케냐 말린디)까지 진출했다. 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총길이가 약 137미터, 폭 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이었고 동행한 함선은 62척에 승무원은 2만 7,800명이 탑승했다.
무엇보다도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보다 70년이나 앞선 대항해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정화가 머물렀던 여러 港에서도 평판은 높아 자바, 수마트라, 태국에서는 삼보 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1405년 6월 시작한 대항해는 1433년 7월 귀국한 7차 원정까지였고 귀국한 지 얼마 후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대항해에 관한 정화의 공식 기록은 다시 대항해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관료들이 감추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