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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May 12. 2020

#31. 말레카 5: 이슬람 박물관과 술탄의 왕궁

아시아의 이슬람 전파 교두보, 말레카의 역할

말레카 이슬람 박물관

언덕 위 세인트 폴 성당을 중심으로 호를 이루는 잘란 코타에 일렬로 늘어선 박물관들과 산티아고 성문, 술탄 왕궁 박물관, 독립 박물관은 도보 1km 이내에 오밀조밀 붙어 있다.

건축 박물관과 이슬람 박물관 나란 붙어있는 붉은색 건물이다.

사람 북적이는 공원, 길거리와는 대조적으로 길가 이슬람 박물관은 들어가는 사람이 안 보인다.

그 한산함에 나라도 들어가 보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다.

건물 안 어디선지 나타난 중년의 남자 직원이 입장료를 받는다.


이슬람 박물관은 말라카 이슬람 종교위원회 (Majlis Agama Islam Melaka-MAIM)의 오래된 건물에 있다.

이슬람이 말라카에 전파된 경로와 경위 그리고 이후 전국에 어떻게 퍼져나갔는가를 보여주고, 이슬람 자료의 수집, 연구, 보존 및 전시의 중추적 역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박물관을 잘란 코타(Jalan Kota)에 세울 , 건물의 대규모 개조 작업을 하였다. 인테리어는 말레카와 Nusantara (인도네시아 많은 섬나라들을 지칭하거나 혹은 그들의 문화)에서의 이슬람 예술의 정체성과 이슬람 예술들의 상호 복합적인 면을 반영했다.

박물관 전시는 최고의 이슬람 전통 예술을 바탕으로 지역 및 국제적인 장인의 협업을 통해 주제에 따라 8개의 주요 전시 공간으로 기획하였다.

그러므로 이 박물관은 이슬람의 도래 경로 및 타 지역 전파에 관한 연대기적 전시장이다.


이슬람 전파에 있어서 말레카의 역할은:

일찍이 말레이 군도는 중국 대륙과 서구를 이어주는 동. 서문 명의 교류와 산업, 종교의 교차로였다.
인도와 아랍 상인들이 드나들며 힌두교, 불교와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이들은 토착민들과 교류하고 섞임으로써 다양한 종교와 문화들을 융합하기도 한다.
이슬람교는 10세기 초에 무역상인들과 선교사들의 전파로 말레이 군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기한 바와 같이 15세기에 이르러 말레카의 술탄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왕은 슈마트라의 사무드라 파세이(Samudra Pasai) 왕가와 동맹을 맺고 파세이(Pasai) 공주와 결혼하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이름도 메갓 이스칸다 샤(Megat Iskandar Shar, 1400-1414)란 무슬림 명으로 개칭하였고 술탄(Sultan)으로서 말라카 왕국의 첫 이슬람 군주가 되었다.

이후 말레카 왕국이 동서 무역 교류의 중심지가 되면서 동남아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파급시키는 역할의 중심에 놓인다. 해상권에 모여든 상인들과 무역인들을 통해 이슬람은 생활 속으로 파고들며 퍼져나가서 동남아시아 이슬람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점차 말레카는 동남아 이슬람 학문과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마을마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와 종교 학교를 세웠고, 이슬람 신비주의인 슈피즘(Sufisim)의 중심이 되어 이슬람을 정착시키고 확산시켜 이슬람국(Islamic State)을 세웠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침입으로 술탄국이 몰락하자, 말레카의 왕족들은 다른 여러 곳으로 피신하여 각자의 왕국을 세운다. 그 역시 술탄국들이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종교가 이슬람인 바탕이다.      


전쟁을 수행한 이슬람 지도자들과 당시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코란, 검, 무기, 그리고 이슬람의 설교대 혹은 종교지도자의 좌석이나 의상 등이 예전의 문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슬람 전시물은 안내자나 안내책자 없이 보기에는 맥락이 서지 않는다.

안내자료 제공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다른 지역의 박물관들처럼 자료 음성해설이 등장할 때가 오겠지만.

복제본이라고는 해도 생소한 문화권에 엉성하나마 접근해본 기회가 되었다.


박물관 앞길을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을 벽 하나로 막고 선 침묵 속 박물관은 지난한 역사와 세월의 깊이를 알리는 점에 있어서 나름 존재감을 지닌다.

내가 접해보지 않은 대상물이란 이유만으로 가치를 폄하하는 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다.

성경 대신 쿠란을, 미사포 대신 히잡, 차도르, 부르카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넓은 시각은 모두에게 요구되지만 특히 여행자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해본다.


직원의 나른한 반 수면상태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왔다.                     

이슬람 박물관

               

박물관 내부
건축 박물관  


말라카 술탄 왕궁 박물관(Malacca Sultanate Palace Museum)

이슬람 박물관에서 불과 400m 거리, 산티아고 성문 바로 옆에 왕궁 박물관이 자리한다.

말라카 술탄 왕궁 박물관은 술탄의 왕궁을 현대적으로 재건축한 것으로 술탄왕국의 자취를 보여준다.    


울타리 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지붕으로 덮인 독특한 건물이 나타난다.

15세기 말라카 왕국 전성기에 건설된 이스타나 왕궁(술탄 만수르 샤의 궁전)을 복원한 곳이다.

사료에 의하면 왕궁은 못이 사용되지 않고 지어졌으며, 조각된 나무 기둥으로 지탱되었고 구리와 아연 지붕이 특징이었다. 술탄 궁은 1459년에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왕궁으로 건축되었으나 술탄이 왕위에 오른 1년 후 번개에 맞아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이 궁전박물관은 목조 복제 궁전 박물관인 것이다. 복제는 16 세기의 세자 라 멜라 유 (Sejarah Melayu, Malay Annals) 문서를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역사 학회 및 말카 예술가 연합의 고증을 받아 전통적인 건축 기술과 재료를 사용하여 이뤄졌다.

건물은 Tickwood로, 지붕은 변형이 거의 없는 'Berlian'나무로 만들다. 쇠못 대신 나무못 혹은 나무 말뚝만으로 이음새를 연결했다. 말카 왕국의 전통 건축 양식이면서, 우리 전통 건축기법과 상통하는 점이다.

박물관은 1984년에 건축되어 문화 박물관이 되었고, 마하티르 모하마드 (Mahathir Mohamad) 총리에 의해 1986년 7월 17일 일반에게 공식 오픈되었다.


복합 건물 내부에는 약 1,500 개의 공물, 문서, 사진 및 그림이 술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 층 박물관은 1300 가지 이상의 아이템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무기류, 그림, 악기 및 외국 사자로부터 받은 선물을 포함, 다양한 무기, 장식 예술, 전통 의상, 놋그릇, 보석류 등 8개의 전시실 나뉘어 있다.

술탄 시대의 궁전 건축 양식, 발리 오롱 세리 (왕궁 왕좌 방), 왕의 침실 (Royal Bedchamber) 및 왕족의 개인 방을 보여다.

또한 디오라마나 그림, 마네킹을 이용해서 말카 왕국 전성기 시절 왕궁의 모습을 재현하, 왕가의 관습과 전통에 따른 궁전생활의 다양한 의식, 유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말레이 인종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를 형성하는 술탄의 시대의 전설적인 카 전사 Hang Tuah와 Hang Jebat 사이의 유명한 전투를 포함, 디오라마 등을 통해  후세에게 교훈적 전설을 묘사한 3 개의 갤러리가 있다


항 투아(말레이어: Hang Tuah)는 말레카 왕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다. 어린 시절 친구 항 푸앗과 함께 해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말레카 왕조의 술탄 무다파 샤,제5대 술탄이 그에게 해군 장군의 직위를 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정의감이 깊어,무다파 샤 술탄 재임 기간 동안,해적들을 소탕하여 공을 인정 받았다고 한다. 무다파 샤 술탄이 죽고,술탄의 아들 만수르 미수라(Mansur Misura)때,항 푸앗과 항 제밧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만수르 미수라를 암살하기로 하였으나,항 투아가 이 음모를 알아채고,그의 친구 항 푸앗과 항 제밧을 죽였다. 이후 말레카는 황금시기를 맞았고,1475년 항 투아는 말레카에서 사망한다.  
항 투아 등의 항(Hang)은 한(漢)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한다.

항 투아의 얼굴은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전문성을 기대한 방문이라면 서양 얼굴과 체격을 가진 마네킹들연출 역사적 고증을 벗어난듯한 실망을 할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이런 문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전시물에서도 나름 얻는 바있다.

이곳이 일찍이 세계 여러 나라의 인종으로 구성된 상인들이 몰려드는 대단한 해상무역의 요충지였으며 이들을 통해 각 문화들이 뒤섞이고 전파되었을 시대의 흐름을 상상케한다.

우리는 현대에 살면서도 자국에서 외국인을 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인도인, 중국인, 아랍인,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상인, 급기야는 유럽인을 비롯, 아프리카인까지 모여든 집합지가 된 개연성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이런 조건때문에 이 땅을 달구었던 무역과 종교와 전쟁으로 치열하게 충돌하거나 접목되면서 빚어낸 역사는 비록 어설픈 디오라마라고는 해도 담고있것은 진하고 강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니 더 공부하고 더 알아보면 이 전시공간은 좀 더 깊은 역사 속으로 우리를 안내할 바가 분명히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궁정 박물관을 짓는 토대가 되었던 만수르 술탄(Mansur Shah, 재임 1456-1477)시대가 오늘날 말레이시아에 퍼져 살고 있는 페라나칸의 시초로 본다.

당시 말레카는 북쪽 태국의 시암왕을 달래기 위해 금으로 만든 꽃을 3년마다 보내며 달래보지만 여의치 않자, 명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영락제는 이들을 안심시키며 황실의 공주와 결혼을 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항리포 공주(Puteri Hang Li Poh: 혹은 황실의 궁녀?)였다. 시집오면서 그녀를 수행한 5백 명의 중국인들에게 술탄은 Bukit Cina에 궁전을 지어 거주지로 삼게 했다.

( Bukit Cina는 네덜란드 광장에서 동북쪽으로 1km 떨어진 지역. 그 안에 명나라 장군 정화가 판 우물 ‘항리 포’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정착하였고 그들의 후예를 Peranakan이라 한다.

후에 말레이시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들이 이룬 페라나칸 문화는 오늘날 독특한 점으로 주목 받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이들의 문화는 생활속으로 스며들어 더 각별한 특징을 발산하고 있는 듯 하다.


이 결혼 이후에도 끊임없이 중국인의 유입은 있었지만, 19세기에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된 주석광산, 고무나무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 수요로 본격적인 중국인 노동자 '쿨리'들의 이동이 이뤄졌다.

페라나칸들의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의 해외 유학이 증가했고 이들은 점차 주도적인 사회 계층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몇 해 전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오던 중 비행기에 말레이시아 중국 여성과 앉게 되었다. 장시간 비행이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페르나칸이냐고 묻자 펄쩍 뛰면서 중국인 혈통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부자겠다고 말하니 미소 지을 뿐 그 말에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 느낀 바로는 동남아에 퍼져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자신이 순수 중국 혈통임에 자부심을 갖는 걸로 읽혔다. 대가족을 동반한 그 중국인 여행팀들의 분위기는 특유의 자신감이 넘쳐났다.     


 박물관 건물 밖으로는 넉넉한 터에 자리한 정원이 잘 가꿔져 있다.


독립 박물관

박물관 울타리와 인접하여 콜로니얼 양식의 독립 박물관이 있다.

1912년 지은 건물로 영국 식민지국 관리들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1985년 설립되었다.   

 

1957831, “독립7번이나 외칠 만큼 감격적인 독립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오랜 유럽 열강들의 지배와 사이에 일본의 지배까지 1511년부터 1957년까지의 근 450년을 남의 나라 지배하에 있던 '말레이'가 마침내 독립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감격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말레이시아가 되는 것은 동말레이시아 즉 보르네오섬 북부를 포함한 1963년에 수립되었다.)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메르데카 스타디움에서 '메르데카'라는 말을 7번 외침으로써 독립을 선언했다. 그 자리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독립을 축하하며 감격을 나누었다.

그 장면을 그림으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근처의 커다란 나무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수마트라섬 수리비자야 왕국의 한 왕자(Paramesvara)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였다. 그는 이곳에서 궁지에 몰린 아기 사슴이 자신의 사냥개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작은 힘으로도 용맹하게 맞서면 큰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근거로 이 장소 선택을 주장했다고 한다. 나무의 이름을 딴 말라카 술탄국 건설이 1402년이며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말레이시아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독립 박물관 건물과 주를 나타내는 깃발
독립을 기념하여 운집한 말레이시아 국민들과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수상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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