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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5. 풀라1: '로마 유적 도시' 풀라의 아레나

풀라 아레나에 깃든 로마의 자취

by yo Lee

로마의 유적 도시 풀라로

로빈과 풀라간 이동은 버스로 약 45분 소요, 40km 거리란다.

풀라는 로빈과 같이 이스트라 반도의 도시로 BC 2세기 로마에 정복되어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한 가장 큰 도시였다.

至難한 근대사 속에서도

‘고대 로마의 유적지’라는 수식답게,

무려 2천여 년을 거스르는 로마시대 유적들이,

나름의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로빈에서 풀라로 가는 완행 버스는 내륙 길로 여러 동네를 거쳐 간다.

차창으로 보이는 현지인들의 모습은,

관광지 못지않은 호기심을 끈다.

유적뿐 만 아니라, 현지인 삶의 모습도 여행자에겐 의미로운 포커스이다.


풀라를 향해 달려온 45분의 약간 아쉬운 버스 드라이브가 끝나고,

내려 선 풀라의 버스 터미널은,

로빈의 길가 주차장과 대조적으로

매우 넓직하다.

그래서 터미널 입구를 출발점으로 잡는데서부터 방향 잡기 혼란이 왔다.

풀라 버스 터미널

‘고향에 돌아 온 歸鄕者’ 모습은 어디로 가고 숙소찾기 험란.

전적으로 대중교통 이동 여행이다보니, 방문지 터미널 승하차장에서 도로까지 나가는 길이

이동경로의 스타트선이다.

그래서 여행준비 과정 중

가장 시간품 많이 드는 과정이,

대중교통 도착점에서 새 숙소 찾아가는 경로찾아 두는 일이다.

도시의 체류 시간이 짧으니 여기서 머뭇거리면 전체 일정이 달라지는지라,

‘고향 돌아 온 歸鄕者의 능숙함으로!’ 숙소 찾아가기가 여행 기획의 첫번째 슬로건이다.


그런데 풀라 숙소 찾기는 예외상황이 발생했다.

터미널 출구를

매표소 안쪽의 골목으로 잡는 바람에

준비한 자료와 어긋나기 시작한 곳이다.

아니, 출발 전부터

주소를 입력해도 숙소위치가 지도에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유독 풀라의 이 숙소는 애를 먹었었다.

더하여, 인터넷 지도 스트리트 뷰 촬영시기가 오래된데다 그새 크로아티아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변모한 탓에, 영상물 참고도 불가능하다.

준비해 간

인터넷 지도 캡춰 화면, 숙소의 크로아티아어 주소, 예약사이트에서 캡춰한 숙소 사진들을 보이며

여기저기 물어도 해결이 쉽지 않다.

(여행 당시에는 maps.me 앱을 미처 몰랐고, 지금처럼 폰 저장아닌, 출력물로 만들어갔다.)


영어 소통이 안되고 시간은 흐르니, 땀이 줄줄 흐른다. 짝꿍은 길가에 가방을 지키고 서있고 나는 이리저리 골목을 헤맨다.

그러다 어떤 집 현관 기둥에 붙은

숙소표시를 보고, 주인을 잡고 물어보니 '확신할 수 없으나 아마도...' 라며

손으로 언덕위 방향을 가리킨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도보 15분거리가, 땀으로 얼룩진 50분이 되고 말았다.

유심 사용 안하던 그 때로선

충분한 사전 준비만이

통화보다

정확한 이동을 담보해주리라 믿었다.


풀라의 숙소는,

비록 막다른 골목 맨 끝에 있어

찾기는 어려웠지만,

숙소는 사진에서 본 대로였다.


규모 큰 3층 가정집을 개조한 듯하다.

조용하고 무엇보다 정원 담장 너머 보이는 현지인들의 생활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다.

더구나

헤매다 들어와선지

오랜만에 찾아온 푸근한 친척집 느낌도 난다.


마당 별채쪽에 앉아계신 여주인의 연로한 시어머니께서 연신 미소를 보내주신다.

먼 길 찾아온 길손에게 보내는 무언의 환대!

작은 정원과 파티오, 바비큐 화덕, 별채가 있었고 2층 객실은 전체 60㎡ 의 넉넉한 크기에 거실과 부엌이 시원하게 넓다. 돌벽에 나무로 만든 루버 덧창이 달린 이 지역 주택문화가 느껴지니 정말 친척집같은 분위기다.

'아무렴 호텔에 비할까' 하는 게

현지인의 주택가 숙소나

아파트 숙소를 선호하는

나의 생각이다.

현지인들의 주택지에서 그들의 생활을 좀 더 밀착해서 들여다 보고 싶은 것은 여행자의 공통점일것이다.

뜰에 피어난 작은 꽃 위로 짙게 드리운 넝쿨식물의 그림자가 무늬를 만드는 작은 화단에는 주인의 손질이 곳곳에 스며있다. 큼지막한 바비큐 화덕은 이곳에 머물렀던 누군가의 오래갈 추억의 식사를 마련해 주었음직하다.

담장 너머 옆집들

예약사이트 이벤트로 호스트가 제공한 약한 과일주 한잔에 슬쩍 올라온 감흥이 로마시대를 연상 시킬 풀라에의 기대감을 한껏 키운다.

부족한 일정을 채우기 위해 해질 녘, 석양을 등지고 대문을 나서니 우리의 기인 그림자가 앞장서서 원형경기장으로 안내한다. 골목길 휘어져 5분 거리에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아까는 숙소 찾는데 신경쓰느라 지나쳐 오면서도 살펴 볼 여유가 없었다.

풀라의 모습(풀라관광청 발췌: https://www.pulainfo.hr)

풀라의 역사 (나무위키 옮김)

크로아티아 서북부의 항구 도시. '크로아티아의 로마'로 불릴만큼 로마 유적이 많다.

원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리리아 인들의 거주지로, 폴라이로 불렸다.

기원전 177년, 로마에게 정복되며 현재 위치에 도시가 만들어졌다.

일리리아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반도와 마주보는 발칸 반도 서부지역. 현재의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의 국가에 해당. 기원전에는 일리리아 왕국이었으나, 고대 로마 공화정 에 정복된 후에는 로마의 속주 '일리리쿰'이 되었다. 이 지역 출신 황제들로는 아우렐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우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1세,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등이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고 인구 3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 연합과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 & 카시우스 간 내전에서 풀라는 후자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2차 삼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재건되면서 세르기우스 개선문과 원형 경기장 등 대부분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워졌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에 풀라는 황실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며 악명이 높았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354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 갈루스가 처형되었다.

425년, 도시는 주교령이 되었고 476년에는 오도아케르(서로마 멸망시키고 초대 이태리 왕이 됨)에게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후 풀라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을 거쳤고 788년부터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1148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 동안 풀라는 1397년에 재차 제노바 군에게 함락되었고 그 외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전염병도 발생해서 1750년에 이르자 풀라는 3천여 명 거주의 작은 도시로 쇠락하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풀라는 프랑스 제국령 일리리아주를 거쳐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내륙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제국은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획득으로 유일한 해양 진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해군의 핵심기지로써 기능, 1859년에 해군 기지가 지어졌다. 이시기 합스부르크 황실은 풀라로 여름 휴가를 오기도 하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다.

1943년부터는 독일군의 U 보트 기지로 쓰이며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나치 군대와 파르티잔은 서로 적군의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풀라에는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과 처칠의 도움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소속되었다. 이후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풀라 북쪽 50km 떨어진 (현재 이탈리아령) 트리에스테 쪽으로 집단 이주하였고 이때부터 이탈리아식 명칭인 폴라 대신 풀라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 유고 연방이 해체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아레나 앞의 바다

원형경기장 풀라 아레나

풀라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많이 보았던 원반형 아레나는 실물로 보니 거대하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현존하는 원형극장 중 가장 보전이 잘된 곳으로, 로마의 콜로세움보다도 보존이 더 잘되어 있다는 풀라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BC 2세기부터 로마 지배하에 놓였던 이곳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건설되기 시작해 약 8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고대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건설되었다.

원래 목재로 지어졌던 것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검투사들의 경기를 위해 이 지역 이스트라의 흰 석재, 석회암과 화감암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하얀 석회암은 오랜 세월 동안 색이 많이 변했다.

지면은 타원형이며 장축은 약 130m, 단축은 약 100m, 벽의 높이는 30m이다.

검투사들의 싸움은 경기장이라고 불리는 중앙 평평한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관중들은 석조 층에 앉아 있거나 갤러리에 서있을 수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기사 대회와 박람회가있었다.

원형 극장의 타원형 외관은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계단식 아치로 되었으며, 외벽과 연결되어 있는 네 개의 측면 탑과 3개의 로마 건축양식의 기둥이 온전히 보전된 상태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권력투쟁을 막으려고 아들 크리스푸스와 사촌 동생 갈리우스를 처형한 곳이며, 검투장으로 이용할 당시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에 성당건축은 물론 인근 주택건축용으로도 이곳의 석재를 가져다 짓는 바람에 훼손되었고, 19세기에 다시 복원하였다.

검투사가 사용했던 지하 통로는 오늘날 Istria에서 생산한 포도와 올리브 제품을 정기적으로 전시한다.

올리브 오일과 와인생산에 사용된 사용 된 밀, 프레스, 침전용기와 올리브 오일과 와인 저장 및 운반에 사용되는 포장재 등이 전시된다.


현재는 약 5천명을 수용하여 콘서트, 오페라, 발레 공연, 스포츠 경기등이 열리고 7월에는 영화제(Pula Film Festival) 행사 장소로 쓰인다. 여름철에는 매주 역사 및 엔터테인먼트 광경 "Spectacvla Antiqva"의 일부로 검투사 싸움을 개최한다.

풀라 영화제는 1954년부터 이곳 아레나에서 개최되어 왔고 골든 아레나(Golden Arenas)라는 영화시상식도 함께 열린다. 아카데미상, 영국 아카데미상, 세자르상, 고야상 등에 비견되는 상이다.

1960년 이래로, 유고슬라비아의 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세계적으로 이름 나있다. 하지만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과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영화제 개최가 취소되었다가 1년 후인 1992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어 크로아티아의 영화제·시상식으로 개최되고 있다.


일몰이 다가와 관광객들도 적으니 적막한 느낌이다.

오래전 본 로마 콜롯세움에서는 거대함과 스산함에 압도되던 것과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이다.

경기장 사방이 트인데다가 아주 가깝게 바다가 있는 주변 환경때문이가 싶다.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석재와 부서져 내리는 돌벽, 역광으로 보이는 장대한 실루엣이 로마시대로의 타임머신을 제공한다.


벽을 따라 정면으로 돌아드니 바다 넘어 뉘엿뉘엿 지는 석양이 경기장에 조명을 발하고 있다. 석양의 황금빛살이 화감암 흰 벽에 부서지고 기둥들 사이 진한 음영을 만들어 위대한 건축물임을 제대로 부각시키는 천연조명발을 받고 있는 시간이다. 마치 연극의 클라이막스 배경처럼, 정문에서 본 경기장의 위용은 여전히 건축물로서 ‘살아 있음!’ 그 자체였다. 삶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치열한 시간의 기억을 내밀하게 여전히 반추하고 있는 모습은, 가슴 밑바닥에 잔인한 기억을 묻고도 삶을 이어나가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늙은 노병의 모습처럼 처연하기도 하다


경기장을 둘러보다 해변으로 나간다.

중세에는 여러나라들의 무역선과 해경선박이 드나들었을 浦口 쪽, 티토광장이 나타난다.

건너편에는 베니스로 가는 훼리터미널이 보이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쪽에 유고를 이끌던 대통령, 티토(1892~1980년)의 이름을 딴 공원에 여러 동상들이 서있다.

티토는 슬로베니아 아버지와 크로아티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유고연방을 이끌던 대통령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전 대통령이자 비동맹 운동의 전 의장 등으로 표현된다.
나치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뒤에는 파르티잔을 본격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고, 1945년 3월 7일에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국호로 정식 정부를 수립했다.
1974년 신헌법 제정으로 종신 대통령 직책을 얻으며 유고연방을 이끌다가 80세로 타계했다.
유고 슬라비아 초대 대통령 티토 (나무위키 발췌)

동상들은 오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을까?

저들이 향하고 있는 바다는, 도시의 고단한 하루를 간직한 태양을 품안으로 안아들이려는 중이다.


몇세기 동안 운명을 같이 한 베네치아의 몰락 이후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전전하면서 많은 상처를 입은 풀라의 석양빛이 역사만큼 진한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원형경기장과 티토공원을 바라보며 이 땅에 서린 역사를 더듬는데,

동네 아이들이 놀이로 더워진 몸을 식히려 벗어젖힌 겉옷을 머리에 두르고 석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가고 있다.

둥지를 찾아가는 아기 새들처럼 긴 그림자 늘이며 집을 향하는 이 아이들은 자라서 또 어떤 역사로 이 유구한 역사에 이어붙이기를 할까?

민족해방 전쟁의 투사들과 1941-1945년 파시즘의 희생자들에게 이스트라의 민중이
뒤에서 본 기념 공원
공원의 아이들

이어져 있는 유적들의 거리 포럼 스퀘어를 둘러보고 좁다란 골목길 선물가게도 들어선다. 올망졸망 기념품들이 잘 진열되어 있다. 몇개를 줏어들고 마트로 간다. 숙소의 좋은 부엌설비를 활용할 때가 온것이다.

저녁식사 재료를 챙겨 계산대 앞에 줄선다.

현지인들과 섞여 선 줄이 길다

양손에 나눠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밤길, 봄향기 가득 머금은 밤의 정취가, 먼길 떠나온 여행자 가슴에 향긋하게 파고든다.


< 밤의 풀라 거리 풍경 >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Forum Square
밤의 아레나

< 아레나 페스티벌 ; 풀라 관광청 사진 >

4년전 우리의 크로아티아 여행 시기에는 풀라 관광청 사이트 이용 할 생각을 못했다.

몇 년 사이에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정식 관광청 사이트를 통해 여행지 홍보를 하고 있다.

점차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추세여서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풀라 관광청(https://www.pulainfo.hr

tel: +385 52 219 197

fax: +385 52 211 855

e-mail: tz-pula@pu.t-com.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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