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크로#4. 로빈4: 성 에우페미아 성당, 발비스 아치

도시 수호 성녀 에우페미아를 모신 성당으로 오른다.

by yo Lee

성 에우페미아 성당

골목길로 들어서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니, 오늘 새벽빛 속에 고고히 서있던 바로 그 에우페미아 성당이 지척에서 굽어보고 있다. 키 큰 삼나무들이 언덕을 오르는 우리를 에스코트하며 성당으로 이끈다.

로빈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성당은 1736년에 지어졌으며 총길이 51m, 너비 약 30m 정도로 이스트라 반도에서 가장 큰 바로크 건물에 속한다. 종탑 높이 57m로 로빈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성당 이름에서 짐작되듯, 로빈의 수호 성녀인 에우페미아의 석관을 모시고 있다.

바람따라 움직여 풍향계 역할하는 종탑 위의 상
성당으로 오르는 골목길
성당 입구
마을과 성당이 연결되는 길
성당 아래 마을
성당으로 들어오는 문

성당 안으로

성당 입구에 들어서서,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예수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 눈과 마주치니 '찌릿' 실제감이 느껴진다. 놀랐다.

수없이 많은 성당들을 거쳤건만 드문 경험이다.

저 옆에 서 계신 성녀 테레사 수녀께서

"그러게, 둥글둥글하게 살면 인생 더러 가벼워질 거잖아!" 하신다.


여러분도 성당 들르시면 예수님과 한번 눈 맞춰보시길!

성 에우페미아 성당 전경
종탑


예수 성상과 성녀 테레사 수녀 상
미사 중
중앙 제대


성녀 에우페미아 석관

제대 오른쪽에 모셔진 성녀 에우페미아(혹은 에우뻬미아, 유뻬미아, 유페미아) 석관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서 있다. 칙령 발표로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15세 어린 나이로 순교한 성녀 에우페미아의 관이다.

기독교 신앙과 위배되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기리는 의식을 거부하다가 사자에게 던져졌으나 오히려 사자가 상처를 어루만지며 죽이지 않았다. 그러자, 석관에 넣어 죽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녀의 고향인 칼케돈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히포드럼에 유골을 모셨다. 그러나 800년 성상파괴 운동의 여파로 관을 치우라는 명령에 따라 떠돌게 된 대리석 석관이 유령선에 실려 로빈의 해안에 닿았다. 사람들이 여럿 달려들어 석관을 옮기려 해도 요지부동이다가 소를 데리고 나타난 소년에 의해 옮길 수 있었다는 내용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사람들은 성녀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아, 후에 1763년에 지어진 성당 한 옆에 석관을 모셨고, 그 이름을 따서 성당 이름을 지었다.


고대 저술가들과 교회는 성녀 에우페미아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기원후 약 307년 무렵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451년에 공의회가 열린 칼케돈(Chalcedon)을 포함하여 수많은 지역에서 그녀를 높이 공경하고 있다. 9월 16일이 축일이다.

성녀의 유해는 순교 500년 후인 800년경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카톡릭 굿뉴스 발췌)

사자에게 던져진 성녀를 오히려 혀로 핥아주는 사자들
바닷가로 흘러 온 성녀의 석관을 소를 이용해 언덕 위로 옮기는 로빈 사람들
성녀의 석관
성녀의 시신( 모형?)사진과 석관 ( 가톨릭 굿뉴스 발췌)

성당 문을 나서 한 바퀴 돌아본다.

교회 돌담에 기대어 시선을 먼바다로 던진 포즈 사람들이 번갈아 사진을 찍는다.

건너편 작은 섬의 우거진 녹음과

수평선 멀리 푸르디푸른 코발트색 물감을 뭉텅 풀어놓은 바다가 배경이 되니,

‘인생 사진’ 건질 뷰 포인트 딱이.

느릿한 걸음의 서양 노인들도 여기서는 사진 찍기를 사양치 않는다.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높은 언덕에서 바람맞으며 자라난 키 큰 나무들은 눈부신 햇살 아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다.

성당 언덕 아래 동네에 머리를 맡 댄 주택들은 청량한 햇살과 나무 사이를 지나온 바람에 씻겨진 듯, 기와지붕 붉음이 유독 선명하다.

아드리아해 색과 대비되니 더더욱 붉다.

성당에서 그리시아 거리로 내려가는 계단

발비스 아치와 로빈의 역사

성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길은 돌로 보도를 깔아놓은 그리시아 길이다. 그 끝에서 중앙광장으로 나가려면 통과해야 할 낮은 아치가 있다.

1679년에 세워진 Balbi's Arch이다.

아치 상단의 바깥쪽에는 터어키인 두상이 조각되어 있고, 구시가지 쪽인 안에는 베네치아인의 두상을 조각했다.

그 윗부분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아치 바로 옆으로 이어서 지은 주택들 높이에 묻혀 이 아치를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17세기, 이 성문 아래로 해상 무역선을 타기 위해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오갔을 그 당시 모습은 또 어땠을까?

154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후, 최강 국력으로 유럽을 차례차례 점령해 가던 17세기 오스만제국!

이에 맞서 자신들의 앞마당 격 아드리아해의 거점인 달마티아에 이어 이스트라마저 빼앗기지 않으려 자웅을 겨루던 경쟁관계 베네치아가

굳이 아치의 앞면에 터어키인 조각을 해 준 이유?

코앞까지 뻗쳐오는 오스만에게 위기감을 느낀 베네치아의

회유의 표시란다.

그러나 뒷면에 새긴 베네치아인 조각상을 통해

당시 상황에 대처하는 베네치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발비스 아치

로빈의 역사

로빈은 원래 섬이었다. 3~5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7세기에 슬라브족이 정착하면서 어업과 해양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탈리아 해안은 평탄하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데 반해 발칸 반도의 연안은 평지가 거의 없고 복잡한 해안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회암 회색의 험준한 준령, 디나르 알프스의 위용을 크로아티아 여행 동안 버스 창을 통해서 자주 내다보았다.
이렇게 복잡한 해안선은 아드리아해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근거지였다. 천혜의 항구를 만들기 적합했고, 풍랑이 거셀 때 피난처가 되었다. 해적들의 눈을 피해 잠복하기도 쉬웠다.

베네치아는 이곳을 함대의 방어기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로빈 주변만 해도 약 22여 개의 섬들이 바다에 떠있다. 시야가 툭 터진 아드리아해를 보는 것은 두브로브니크까지 내려가서야 가능했다.

로빈은,

1199년에 해양업 보호 목적으로 두브로브니크와 조약을 맺었으나. 13세기에 해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베네치아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스트라 도시들은 근 800년간 베네치아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고 다른 크로아티아 지역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된다.

16~18세기, 오스만 제국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침략하자 이를 피해 들어온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도시는 베네치아 인들이 쌓아 올린 성벽 안에서 발전했고 작은 섬이던 로빈은 1763년 본토와 연결하면서 반도로 바뀌었다. 이때 7개의 성문이던 것이 육지와 연결되면서 3개로 줄었다.

그중 중요한 성문이 바로 발비스 아치이다.

17세기 로빈은 해양업이 크게 발달했지만 1719년 오스트리아가 트리에스테와 리예카를 자유무역항으로 만들면서 로빈의 조선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마침내 풀라의 조선소로 옮겨가 버렸다.

로빈은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다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순으로 피지배국이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유고슬라비아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6월 유고연방의 다른 3개 공화국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독립을 선언했다.


유럽의 화약고 발트국가라기보다 오히려 이탈리아에 더 가까운 로빈.

1차 대전 후, 무솔리니는 약 4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이스트라 반도에 이주시켰다. 1차 대전의 패배로 물러갔지만 이주민들에게 이탈리아어만 쓰게 하고 슬라브 문화를 일절 금지시켰던 영향력은 2차 대전 후 유고연방에 포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이탈리아 분위기가 강한 지역이 되었다.

현재 로빈에는 특정한 사투리의 이탈리아인 마을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호텔이 들어서 있는 해변과 선착장
로빈 해안에는 섬들이 22개 있다.

로빈을 떠나며

짧은 일정이 아쉽기만 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도 아깝다.

해안을 따라 잠시 거닐어보는데

바다 물결이 곁에서 친근하게 넘실대며

우리가 걷는 길따라 동행한다.

어디서든 시가지에서 쉽게 맑은 바닷물에 발을 적실 수 있는 곳, 로빈이다.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장대한 바다가 아닌, 자연을 친화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점이, 이곳 이미지에 플러스로 작동한다.

아담한 규모라 도보 이동만으로 둘러보기 충분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며 걷는 골목길 투어는 아기자기함 폭발,

하루 일정으론 너무 짧았다.

사람에 치이지 않는 여행지이자, 이곳에 축적된 천 년 너머의 시간의 깊이를 옛사람들이 걸었던 골목길과 그들이 누볐던 해안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시가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주민들의 삶을 담고 있으니 역사 속의 박제된 유적을 보는 게 아니다.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에 우리도 동참한다는 생동감 주는 로빈을 크로아티아 여행지에서 빼놓지 않기를!


버스터미널에서 스친 한국인 여행자

로빈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이 마침내 우리가 탈 버스가 도착했다.

내리는 승객 중 한 여성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홀로 여행자’인 한국 여성이었다.

너무 반갑다. 더 일찍 만났더라면 잠시라도 동행하는 여정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건강하게 즐거운 여행 하세요.’ 인사로 서로의 찐한 마음을 대신한다.


버스 짐칸에 서둘러 짐을 넣고 추가 요금을 준비한다.

운전기사에게 짐값을 지불하려는데, 버스정류장 관리 요원이 다가와서 우리에게 얼마를 내라느냐고 묻더니, 낮은 금액으로 정정해 준다.

크로아티아는 같은 노선이라도 운행 버스회사 따라 요금에 차이가 있다.

비록 적은 액수지만

올바로 대우받는다는 느낌이,

여행자의 높은 긴장감을 무장해제시킨다.


아쉬움 뒤로하고 두 번째 도시 풀라를 향해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다.

왼쪽이 로빈의 버스 터미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