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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6 . 풀라2:악티움해전 승리와 세르기우스 개선문

세르기우스 문에서 회상하는 영화 '클레오파트라'

by yo Lee

여행지 아침 식사

새벽, 짝꿍 깨우지 않으려고 살짝 침실을 빠져 나왔다.

아침식사를 미리 해둘 요량이다.

침실, 거실, 부엌 등 넓이가 넉넉한 이 숙소는 하루만 묵는 것이 섭섭할 지경이다.

유럽 주택 흔한 나무 루버,

그 안쪽 이중 문은

빛 조절과 단열에 유리할 것 같다.

우리나라도 점차 아열대화 되는 기후변화를 대비하려면,

전통 건축의 깊은 처마 기능 대신 할만한,

창문 형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창을 열어제치니

정원 나뭇잎 사이로 달려오는 공기가 사뭇

신선하다.

하늘은

아직 짙푸른 밤하늘과 여명사이로,

신비스런 청보라 물감이 흥건하게 적셔지는 중이다.

새소리 들으며 가만가만 식사 준비를 하자니 그예 일어난 짝꿍이 뒤쫓아나온다.

부엌이 넓으니 둘이 함께 신속하게 아침을 준비한다.

막 끓인 햄 감자찌개에

공수해 온 장아찌들로 차려진 식탁은,

어제 저녁식사와 마찬가지로

여행자 치고는 성찬다.

포만감 넘치는 식사 후,

정원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커피도 한잔 마신다.

겨우 일박의 아쉬움을 가방 차곡히 접어넣고, 풀라의 아침거리로 나선다.


골목길 끝에 이어진 아레나쪽으로 가보니,

바로 옆 골목에 성 안토니오 성당의 높은 종탑이 보인다.

성당은 1930년대에 지어졌으며 풀라에서 가장 높은 45m 종탑이라고 한다. 종탑 꼭대기에 성 안토니오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상이 있다고.

성 안토니오 성당
아레나 벽에 붙어있는 야외 카페와 뒤편에 종탑이 보이는 성 안토니오 교회

아침의 아레나에는 관광객들이 벌써 와 있다.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이 곳에서 열리는 7월 밤의 영화제나 오페라 혹은 검투사 시합을 보고 싶어서

다음 번엔 꼭 여름에 다시 올수 있기를 빌어본다.

쏟아지는 별빛과 조명발 아래의 아레나는

어떤 모습을 연출해줄지 상상해보며!

아레나 인근 베니스 행 선착장

아레나를 돌고 인근의 해변으로 간다. 베니스행 선착장이라

마침 도착한 단체 여행객들 행렬이 보인다.

해변가 공원
아래나 주차장

풀라의 옛 성벽길 돌아보기

아레나 곧 Giardini 거리로 이어진다.

아래 '옛 그림'의 오른쪽 성벽을 따라 걸어 현재의 Giardini 거리에 있는 세르기우스 개선문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그림에서 보자면 왼쪽 원통형으로 높이 솟은 곳이 Fortress 성, 중앙이 아레나,

그림 아래쪽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길이 Giardini 거리이다.

Louis François Cassas (1747-1825년) 아레나(위키피디아)

쌍둥이 문 (Porta Gemina)

쌍둥이 문은 고대 문 입구의 장식 기능을 갖춘 초기 문 유적 위에 지어졌으며 풀라 성벽의 일부를 구성한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 풀라는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통로는 12 개의 문이 있었다.

이 문은 그 중 하나이며, 2 개의 아치형 개구부가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기원후 2-3세기에 지어졌다.

성벽은 황폐해지고 불필요해져서 19 세기 초 철거되었다.

그 중 쌍둥이 문과 지아르디니 광장(개선문 앞 광장) 사이의 벽 부분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현재 이 문을 통해 Istria의 고고학 박물관과 작은 로마극장 으로 이어지는 안뜰로 입장할 수 있다. 문 앞에서 1~2 세기(혹은 2~3세기)의 무덤인 팔각형 무덤 건물 유적이 발견되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지금 공사중이어서 안뜰로 입장 할 수 없다.

쌍둥이 문
쌍둥이 문 안의 닳아서 반들거리는 포석

헤라클레스의 문

성벽을 따라 걸으면 곧 헤라클레스의 문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조각되지 않은 석재 블록으로 지어진 단순한 구조의 중세 타워 2 개 사이에 있다.

손상된 아치의 꼭대기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헤라클레스와 그의 측근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근처에는 손상된 비문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로마 관리로서 당시의 풀라를 로마 식민지로 건설 할 의무를 맡았던 Lucius Calpurnius Piso와 Gaius Cassius Longinus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로마 상원에 의해 풀라 만으로 보내져 식민지를 형성하고 건설했다.

따라서 기원전 47 년에서 44 년 사이에 풀라는 도시 특징을 가진 정착지로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원형 도로가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문의 축은 성벽 방향에 대해 비스듬하게 배치되었다.


헤라클레스 문

세르기우스 개선문 (골든 게이트)

Sergii의 아치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이다.
원래 성문인 이 개선문은 Actium 전투의 승리의 상징으로 세워졌다.
세르기 가족에 의해 기원전 29 년에서 27 년 사이에 세워졌으며 그 당시 풀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세 명의 가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특히 악티움 전투에 참여하여 기원전 27 년에 해산 된 29군단에서 복무한 호민관 루시우스 세르지오 레피두스를 기념한다.
개선문은 포르타 아우 레아 (Porta Aurea)의 성문에 기대어 있었으며, 장식이 풍부한 아치와 성문이 금색으로 인해 골든 게이트로 불렸다. 아치는 초기 로마 식민지의 원래 해군 문 뒤에 세워졌다.
Sergii가는 식민지의 힘있는 관리로서 수 세기 동안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기념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Lepidus의 아내 Salvia Postuma Sergia가 건축비를 지불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이 명예로운 이들의 아버지이자 아저씨인 루시우스 세르지오 (Lucius Sergius)와 가이우스 세르지오 (Gaius Sergius)와 함께 돌에 새겨져있다.
원래의 형태로는, 두 형의 동상은 아치 꼭대기의 양쪽 Lepidus의 측면에 있었다.
비문 양쪽 프리즈에는 큐피드, 화환 등이 조각되어 있고 아치의 밑면 중앙에는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적을 상징하는 뱀이 싸우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쌍으로 된 코린트 식 기둥의 작은 아치 양끝 부분에 날개 달린 승리의 신들은 성문 정면에 만들어졌고 프리즈 아래쪽 부조는 말이 끄는 전차 장면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동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조각되지 않은 반면, 성안에서 바라보이는 서쪽은 눈에 띄게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아치는 장식성과 주제표현에 강한 후기 헬레니즘과 소아시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코린트 스타일로 건축되었다.
이 아치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많은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성문과 성벽은 성벽 너머의 도시 확장으로 인해 19세기 초 문과 벽이 철거되었다.


구시가지쪽에서 바라본 개선문
아치 밑면의 독수리 조각과 양옆 스팬드럴(spandrel)의 날개 달린 '승리의 신' 부조
프리즈(frieze)의 말이 끄는 전차 부조. 그 옆의 큐피드와 화환 부조
개선문에 새겨진 글자.
아치 중앙부의 로마 상징 독수리와 뱀이 싸우는 조각 (위키피디아)
개선문을 통해 성 안으로 향하는 여행자들
Charles-Louis Clérisseau의 18 세기 작품: Sergii의 아치와 원래의 관문 (Porta Aurea) (위키피디아 발췌)

개선문의 높이는 8m이며

그림 속에서 개선문 양 옆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풀라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개선문과 관련된 인물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어린 시절 인상깊게 본 영화 주인공 '클레오파트라'가 덩달아 소환된다.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댄스 경연대회
개선문 위에서 본,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지아르디니 광장(풀라 관광청 사진)

개선문 앞 지아르디니 광장에서 여러 문화 행사가 열리고 거리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개선문과 악티움 해전


로마 공화정 시대, 카이사르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지금의 중동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로마의 지배 하에 가져왔다.

그는 선정(善政)과 대내외 정책 시행을 통해 인기가 한껏 높아졌고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행한 토지분배와 같은 정책으로 자기들의 토지 소유권이 제한될 것을 우려한 기득권층의 모의로

기원전 44년 3월15일 아침, 56세로 죽음을 맞는다.

이때 암살을 주도한 자는,

카이사르의 첫연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죽을 고비에 있을때 카이사르가 살려준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처남 카시우스였다.

카이사르 사망 후, 공동 집정관 직에 있어 정계의 중심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뜻을 모았다.

그가 아직 19살이란 나이임에 자신의 경쟁자가 되리란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미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암살에 대한 반감으로 돌아선 로마시민들로부터

카이사르의 후광을 이용,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부루투스 일당이

안토니우스의 명연설로 인해 입지를 잃어 자결하고,

삼두정치의 한사람 레피두스를 물리친 이후, 두 사람은 로마공화정의 권력을 놓고

적이 되고 말았다.


이 둘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이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이다.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했던 안토니우스.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부가 필요했던 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로마의 군대가 필요했던 클레오파트라와 연인이 되었다.


스펙터클함으로 내게 오래도록 충격으로 남았던 64년판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줄거리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 기원전 31년에 옥타비아누스 측의 아그리파(화실의 석고 아그리파 동일인)가 이끄는 해군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연합 함대와 싸운 악티움 해전(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의미로운 전쟁)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승세를 가져다주었다.

알렉산드리아로 쫓겨 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해오자 자살한다.

결국

삼두정치의 마지막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실권을 장악하여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세리기우스 개선문을 지나 우리가 이동할 다음 장소, 아우구스투스 신전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된다.

조이스의 상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1904년 더블린에서 풀라로 온다. 그는 6개월 동안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해군 장교들에게 옆의 노란색 건물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 입구 팻말이 설명글이다.

그가 앉아있는 카페 이름은 작품명을 딴 '율리시즈'라고.

카페 '율리시즈' 앞 조이스 상
옆의 노란 건물이 조이스가 1904년 6개월간 영어를 가르친 곳

지아르디니 광장으로 이어지는 성벽따라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주민들은 몇백년 묵은 성벽에 기대어 사노라면 더러 시간의 장구함이 전해져 오는 때가 있을까?

19 세기에 헐린 후 일부 남아있는 성벽
Gardini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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