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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May 30. 2020

#13.싱가포르1:싱가포르 역사와 부소라거리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식물원

떤썬녓 공항으로 이동 중. 곳곳의  일본 광고판

이른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롯테리아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152번 버스에 올라탔다. 시내에서 공항행은 109번과 49번이 더 있다. 떤선녓 공항은 중심가에서 7km 떨어져 있다. 베트남전 때 보급품 조달을 위해 시내 가까이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는 세계에서 13번째로 인구가 많은 베트남의 주요 수송능력이 한계에 부딪혔지만 확장할 수 없어서 40km 떨어진 곳에 롱탄 공항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공항 오는 길, 여기저기 베트남과 나란히 ‘JAPAN' 이란 광고판이 역시 눈에 띈다.

베트남판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도이 모이 정책은 1986년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구엔 반 린이 처음 채택, 20년 이상 베트남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다. 베트남 인들은 '이 정책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 가난한 상태일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베트남 투자국가 1위였다.


다이아몬드 플라자와 베트남 도이모이 정책

1군 거리 어디서나 잘 보이는 다이아몬드 플라자가 그 증거이다.  노트르담 성당에서건 통일궁에서건 청록 유리 빌딩은  방문지 앞. 뒤 배경이 된다.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 빌딩이자 최초의 백화점인 다이아몬드 플라자(Diamond Plaza)는 우리나라 업체가 지었다. 청록색 유리로 모든 면을 장식한 20층짜리 건물은 포스코 건설의 첫 번째 해외 일반 건물 프로젝트였다. 1995년 10월 착공해 1999년 아파트 및 사무실을 개관하고 2000년 종합 준공식을 가진 그 건물에 개장한 증권거래소는 베트남의 본격 경제개방을 알리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호찌민 주요 고층건물 공사에서 유일하게 사망사고 없는 무재해 450만 시간을 달성했다는 아름다운 기록도 보유한다. 이 시절 우리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서 '황무지 개척' 같은 험란함을 피와 땀으로 일궈 오늘에 이르렀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2017년부터 투자순위 1위가 일본으로 바뀌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본은 기반시설인 화력발전소·석유·가스관 건설 등의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 5개 중 3개에 참여했다. 벤탄시장 앞 로터리 전철 공사장을 비롯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저런 일본 광고판은 투자의 판도 변화가  달갑잖은 우리 입장에서는 거슬린다.


운좋게도 비행기 빈좌석 옆 배정을 흔쾌히 수락한 체크인 수속도 마치고 시원한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큰소리로 얘기하는 한국 단체관광객들을 피해 구석자리에서 잠깐 졸은 것 같았는데 눈 떠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다.

내가 탈 비행기 마지막 보딩 안내 멘트가 나오고 전광판에도 뜬다. 부랴부랴 짐을 끌고 마지막 셔틀을 탄다. 공항에서 낮잠까지 자다니, 자유여행 초기에 비해 긴장감이 많이 줄었나 보다.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는 7세기 이후 스리위자야 제국에 속하며 자바어로 "바다 마을"이라는 뜻의 어촌 Temasek, 혹은 Tumasek이라 불리었다. 싱가포르 상품이나 각종 명칭에 많이 등장한다.

나짱의 뽀나가르 사원 파괴자로 등장한 스리위자야는 500년경부터 팔렘방을 중심으로 해안도시에서 점차 해상왕국으로 발전한 불교국가였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한 참(Cham)족들이 해상 무역도시를 성립시켜 수마트라와 자바에 몰려있던 상인들을 흡수하자, 스리위자야는 참파왕국을 자주 공격했고, 8세기 초반에는 참파왕국의 수도를 일시적으로 지배하기도 했다.

또한 크메르왕국을 건국한 자야바르만 2세가 볼모로 잡혀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다.

10세기, 최전성기를 맞은 수리위자야가 중국 인도와도 무역관계를 맺으며 뻗어나갈 때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 싱가포르이다.

싱가포르는 1298~1299년에 처음 정착이 시작되었다. 작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이 섬은 14세기에 수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Palembang)에서 온, 상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 왕자가 사냥을 나왔다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을 발견하고 좋은 징조로 여겨 그 동물을 발견한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 '사자의 도시'라며 '싱가푸라(Singapura)'라고 이름을 붙였다.

 (☞ 싱가포르 상징적 동물 머라이언)

머라이언

1377년 마자파히트(Majapahit)왕국의 공격으로 수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빼앗기면서 이곳으로 피신한 수리위자야의 왕자 파라메스와라(Pawameswara)가 전임 왕이 죽자, 싱가포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수리위자야의 멸망으로 1402년 파라메스와라는 말레카로 옮겨가 말레카 왕국을 세웠다. 이로써 수리위자야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후 싱가포르는 15세기 초에 말라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1617년 말레이시아-포르투갈 전쟁 중에 포르투갈 군대가 싱가포르를 불태운 이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영향권 안에 놓였다. 이때는 어민과 가끔씩 해적들이 나타나는 지역일 뿐이었다.

1819년 영국령 자바의 총독 대행인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1781년 ~1826년)가 이곳을 잠시 방문하였다. 그는 쓸모없는 습지 포구였던 당시의 싱가포르 잠재력을 알아채, 교역소 설치에 착수했다. 선점한 네덜란드 견제를 던 그는 조호르의 왕세자 샤아가 술탄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면서 싱가포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싱가포르 항 식민지는 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832년부터는 영국의 해협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의 인도 정부가 1858년부터 이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867년부터는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수에즈 운하 개통과 증기선 출현으로 영국의 해외 활동 번성과 동반하여, 싱가포르는 점차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1869년 싱가포르 인구는 100,000명에 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군대가 말레이시아를 침공(싱가포르 전투)하자, 6일간 영국군은 치열하게  방어하였지만, 1942년 2월 15일 일본에게 항복한다. 일본은 싱가포르를 쇼난(昭南)으로 개명하고 1945년 9월 12일 영국군이 탈환할 때까지 지배했다.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환원되었으나, 1957년에 말레이시에 독립을 허용한다.

1959년에 싱가포르는 리콴유(Lee Kuan Yew)수상과 유솝 빈 이스학(Yusof bin Ishak)에 의해 영연방 자치 정부가 설립되었다가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싱가포르는 식민지 시절부터 말레이 반도의 압도적인 경제 중심지였기 때문에 말라야는 중국인이 다수인 싱가포르경제 점유와 말레이계 인종비율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우려 등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 1964년 7월, 인종주의 분출로 마침내 1965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싱가포르인의 구성

중국계가 74%를 차지하며, 성공한 사업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국계로 정치, 비즈니스, 스포츠 및 연예 분야 등 다양한 사회 분야를 대표하고 있다.      

말레이인이 두 번째로 13%이다. 싱가포르의 가장 오래된 정착민들이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싱가포르는 조호르 술탄국의 일부였으니 당연하다. 인도네시아 자바와 바웬 및 말레이시아 반도 등, 이웃 지역에서 이주해 왔으며 이들의 문화는 이후에 도착한 다른 민족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는 인도인으로 9.1% 이다. 국외의 인도인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주로 영국이 싱가포르 식민지를 세운 1819년 이후 남인도에서 건너왔고 인도계 주민 중 60%가 타밀 민족계의 후손이며 이들의 절반은 힌두교인이다. 기업가적 재능으로 섬유, 보석, 그리고 거의 모든 상품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고 정치계 및 전문 분야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그 외에, 1%에 못 미치는 유럽과 아시아인 혈통이 섞인 유라시아인이 있다. 역시 영국의 1819년 싱가포르 통치 이후이며, 주로 페낭과 말라카에서 이주해 왔다. 대부분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의 유럽계와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인의 아시아계 결합이다. 이들은 주요 미디어와 연예 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12시 55분 떤썬녓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4시 40분경에 창이공항에 내렸다. 비행시간은 약 2시간이다.

표준시 적용이 특하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홍콩과 같은 표준시인 GMT+8시의 시간대를 이용한다. 태국, 베트남은 GMT+7시로는 우리나라와 2시간 차이가 나는데, 더 서쪽에 있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시차는 1시간이다. 이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이 지리상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식민통치의 편의만을 고려해 홍콩 표준시를 모든 식민지에 일괄 적용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두 나라가 여전히 홍콩, 중국과 같은 시간대를 이용하는 것은 국제금융거래에서 유리하게 작용되는 이점 때문이라고.      

창이공항은 공항이라기보다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켰다. 여러 관엽식물을 이용한 실내 인테리어가 참신하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창이공항 출국장


MRT를 타러 가는 길은 ‘Train to City’ 표지판이 안내한다. 끝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낯선 티켓 자동발매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옆의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도와준다. 큰돈은 잔돈으로 바꿔주기까지 한다. 우리나라 지하철에서 가끔 티켓 구매를 어려워하는 외국인을 보는데 이런 서비스에  노령층 유휴인력을 고용하면 어떨까 싶다.

아랍거리에 위치한 숙소는 타나 메라(Tanah Merah) 역에서 환승하고 부기스 역에서 내린다.

큰 병원인 래플스를 기준하니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호텔 사이사이로 뻗은 골목마저 커다란 가로수가 자라 있어서 마치 식물원 속에 건물이 들어선 듯하다. ’벌금’의 나라로써 긍정적 효과인가 싶다.

  

친환경? 건물
가로수

  아랍스트리트의 숙소

 아랍 스트리트는  말레이계 역사, 문화가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거리이다.


부기스 역에서 내려 숙소 가는 길

1825년에 지어진 술탄 모스크가 있고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 부소라 스트리 끝에 위치해 있다. 발리 레인, 하지레인, 아랍스트리트, 부소라 스트리트, 칸다하르 스트리트 들의 길 끝이 모두 술탄 모스크로 향해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종족인 말레이계와 인도계 무슬림을 위해 아랍스트리트(Arab street) 내에 회교사원을 국립 모스크로 제정하고, 또 인근에는 인도인들을 위해서 리틀 인디아(Little India)라는 인도인 거리로 만들어진 구역이라 아랍계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건축물의 풍부한 색깔 경험이 적은 나로서는 잘 디자인된 연극 세트를 걸어가는 기분이다.


부소라 거리의 건물들

요란한 벽화가 그려진 아랍스트리트에 접어드니 저 멀리 술탄 모스크의 돔이 보인다. 하지레인의 건물들은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모습으로 치장되어 있다. 이슬람의 분위기가 이럴까? 환상적인 색상들이 싱가포르 첫 방문인 나의 감각을 마구 마구 자극한다.

점차 굵어진 비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 서둘러 숙소로 들어다.


싱가포르의 도미토리

만만찮은 싱가포르 숙박비에 하필 요금이 껑충 뛰는 금요일 포함 4박을 하게 되었다. 조식 제공하는 베트남 널찍한 2인용 숙소보다 훨씬 비싸다.

숙소는 젊은이들로 넘친다는 것을 입구에 쌓여있는 신발들이 알려준다. 리셉션 너머 공동 거실엔 그야말로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들이 의자와 소파에 파묻혀 폰에 열중하고 있다.

안내된 여성 전용 도미토리 룸은 이미 많은 여성들이 앉아 담소 중이다.

쇠침대 이층이 배정되었다. 어찌나 침대가 높던지 사다리로 오르는 게 쉽지 않다. 칸막이 커튼도 없어서 커다란 스카프를 꺼내 난간에 둘러치니 그나마 가림막이 되었다.      

아까부터 얘기꽃을 피우는 네 명의 여성들은 4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을 뺀 나머지는 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실 매너엔 파렴치범이다.

얘기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 Please, keep it down! "

잠시 멈칫하더니 소리를 조금만 죽인다.

바로 옆 2층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던 여성이 미소 짓는다. 내내 참았던 모양이다.

잠시 쉬다가 비 오는 거리로 나선다.      

숙소 옆 비치로드
North Bridge RD



인도 음식점에서 만난 한국인 여대생들

아랍거리 이슬람 음식점, 엄청 긴 줄 끝에 나도 섰다.

사람 많은 식당은 이유가 있다. 1908년부터 문을 연 인도-무슬림식 레스토랑이란다. 사전 정보 없는 식당에 들어간 탓에 메뉴 선택이 불안하다. 내 앞서 들어선 일본 혹은 우리나라 여성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 옆에 자리한다. 한국인 대학생들이었다. 반가움에 인사를 청하니 의외로 데면데면하다.

메뉴 사진을 보고 소고기 브리야니를 시켰다. 고기와 쌀을 볶아서 만든 것인데 먹을 만했다. 이것저것 다양한 메뉴를 맛보고 싶었는데 옆자리 방어적인 그녀들 태도가 부담스러워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처음 당하는 이 기분 뭐지?

바호 폭포의 호주 여성들과 비교된다.      

다소 불편한 심기를 안고 숙소를 돌아오는 길은 짧다. 그런데 황홀한 야경 심기를 바꿔준다.

석양 대신 어둠이 내려앉은 부소라 거리는 아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이다. 싱가포르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저 술탄 모스크(SultanMosque)는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마지드 술탄 모스크

벨벳 같은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조명발 따라 색깔을 바꾸는 술탄 모스크 황금 돔이 도도한 귀티로 한껏 아우라를 발산한다.

종교의 성지가 오늘은 흥 넘치는 관광의 성지가 되있다. 관광객들과 호객하는 식당 종업원들의 소리가 합해, 여행지 밤을 열정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모두 유쾌하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 거리 부소라 스트리트만의 환상적인 풍경이 싱가포르 첫인상이 되었다.    

부소라 거리


인도네시아 여인들의 한류사랑

다시 숙소로 돌아와 세면실을 오가며 아까의 수다스러운 여성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덕분에 부드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왔단다.

코리아라고 하니 반색한다. 그녀들은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아주 즐겨 본다고 한다. 탤런트들과 개그맨들을 오빠라고 칭하며 나도 모르는 그들의 개인사를 잘도 알고 있다. 풍부해진 표정에 애정 어린 말투가 자기네 피붙이 얘기하듯 한다. 또 다시 한국 연예인 얘기 삼매경이다.

이번에는 그들의 수다가 참을 만 해졌다.

상업성에 시청률만을 목적으로 하는 듯해서 거의 보지 않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매력 있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니...

드라마 역시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파급하는 것도 알았다. 거액 투자하는 웬만한 외교정책보다 돈도 안 들고 더 나은 정책이겠다 싶다.


히잡 쓴 'no manner'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방에서 나는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비치로드의 조경
숙소에서 강 너머 보이는 대관람차 플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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