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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 #9.라스토케1: 슬루니 마을과Slunjčica강

라스토케 옆 슬루니마을 석양에 어리는 전쟁의 상흔

by yo Lee

풀라에서 카를로 비치 그리고 슬루니 마을로

오늘 이동은 풀라에서 210km 떨어진 카를로비치(Karlovac)에 버스로 약 2시간 이동, 슬루니행(slunj)행 버스로 갈아탄다. 카를로비치와 라스토케가 있는 슬루니는 52km,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카를로비치는 이 나라 교통의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이며 역사상 그 이름이 등장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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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프리카, 중동까지 진출하며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이 제2차 빈 전투에서 패배하며

점차 내리막을 걷는 가운데, 1699년 이곳에서 굴욕적인 카를로비치 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헝가리와 발칸 반도 일대를 오스트리아에게

에게해 섬들은 베네치아에,

우크라이나 일부 영토는 폴란드에,

흑해 연안의 아조프 등은 러시아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유럽을 여행하자면

자주 오스만의 자취를 만나게 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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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의 스트리트 뷰에서는 슬루니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지 않아 제대로 내릴수 있을, 내내 조바심이 들었다.

도착해보니 널찍한 버스터미널이다.

블로거의 틀린 정보와 인터넷 지도의 오래된 스트리트뷰때문에 걱정을 사서 한 셈이다.

스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호스트가 다가왔다.

카를로 비치 버스 터미널

슬루니 숙소

호스트의 차로 불과 3분 이내에 도착한 숙소는 첫눈에도 만족스럽다.

전원에 들어선 지역민의 집 2층 통째로 사용하게 된다.

집 사방에 수목이 둘러쳐있고, 뜰 앞 꽃사과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과수원 같기도 하다.

응접용 별채에 안내되어, 역시 과일주를 대접받는다.

벽난로와 조촐한 소품들로 장식된 나지막한 농가 별채가 숙소 분위기에 일조한다.

다시 숙소로 올라와 둘러보니 거실, 침실 2실, 부엌, 욕실이 제대로 갖추어진 숙소는 청결하기까지 하다.

보라색 침구와 가구 일체가 새로 준비된 듯, 깨끗함이 돋보인다.

호스트의 세심한 관리를 보여주는 발코니 보라색 꽃 화분과 부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오솔길, 그 사이로 보이는 농가주택의 조촐한 모습이 더없이 편안함을 안긴다.

크로아티아 작은 동네의 순수한 자연환경과 이곳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가까이 볼 농가 주택 숙소가 마음에 쏙 든다.

호텔보다 몇 배 더 좋다. 숙소 예약사이트 들여다보며 이모저모 따져보는 시간이 집 구매자 수준 이상으로 눈 품을 팔아 예약하니, 여행지마다 숙소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슬루니 지역을 돌아보려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

즈린스키(Zrinski) 거리의 폐가

동네 아이들 몇 이서 기우는 빛을 받으며 축구를 하는 구장을 지나, 버스정류장을 거쳐 조금 더 직진한다.

오른편에 넓은 공터가 있다.

지도에 즈린스키(Zrinskihi) 라고 표기된 곳이다.

잔디밭 건너 소방서
슬루니 마을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 대로 우측에 공터와 다른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이 보인다.

초입의 숙박업소에 이어진 바로 옆 건물은 벽에 온통 총탄 자국이고 그 다음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 몰골을 하고 있으니, 발길이 저절로 이끌린다.


왜 허물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말로만 듣던 1991년부터 시작된 유고 전쟁의 현장을 마주하고 있는것이다.

모진 전쟁의 상흔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살아있는 전시물이다.

마을의 주요 광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다 보니

전쟁 당시 모여든 군중과 이들을 저격해온 세르비아 쪽 민병대와의 교전을 추측케한다.

광장에 늘어 선 폐가. 총탄 자국이 심하게 나있다.
광장에 늘어선 주택, 숙박업소에 이어 선 폐건물
즈린스키 광장

삼위일체 성당(Katolička Crkva Presvetog Trojstva)

광장 건너에는 삼위일체 성당 Katolička Crkva Presvetog Trojstva(혹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교구 교회’) 라는 오래된 성당이 있다.

삼위일체 성당

수리와 철거를 거듭하며 슬루니 질곡의 역사를 반증하는 곳이라고 한다.

성당의 역사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당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중세 시대에 지어졌고, 16세기 말 터키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735년에 복원, 봉헌되었다.

18세기 말에 증축되었고 종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예의 1991년 발발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으로 다시 파괴되고 불탔으며, 이후 재건축이 시작되어 2007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에는 오래된 프란시스 칸 묘지, 프랑코 판 슬란의 팔뚝 장식이 달린 석판, 요시프 2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맏아들로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크로아티아를 지배하던 시기의 신성로마제국 요제프 황제의 크로아티아 발음) 기념탑이 있다.

성당 모습은 남루하고 무너져가는 느낌으로, 노을의 잔영을 얼비추며 기울어지듯 서있다.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있자니 전쟁으로 숨져 간 사람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마음이 절절한 기도가 된다.

불교신자인 짝꿍도 성당 안에 함께 앉아서 침묵에 잠긴다. 아마 같은 마음으로 기원 했으리라.

문 입구에 비치된 敎會紙에는 전쟁 당시의 사진들과 함께 성당 재건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유구한 역사 지닌 이 성당에 서린 상흔이 안타까워 옆에 놓인 헌금함에 작은 마음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군데군데 폐가가 섞여 서있다.

성당 앞에 서서 광장 건너편을 바라보자니, 아까 보았던 집들이 성당을 향해 도열해 있다. 벽에 총탄 자국이 숭숭하게 남아있는 집, 폐가로 쓰러져가는 집, 여행자 숙소로 운영되는 집 등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다.


다 쓰러져가는 저 집에서도 한때 누군가 태어나 자라고 또 생의 전성기를 보내며 집안 가득 행복으로 채웠을 터이다.

총탄으로 폐가가 된 집의 주인들 혹은 근방의 마을 사람들 전쟁 이후의 삶은 어찌되었을까?

사위어가는 잔양에 어둠으로 잠겨드는 폐허와 성당 실루엣이 마음에 각인된다.


‘밀란 네랄리치 하우스’ 올림픽 사격부문 동메달리스트의 집

어둠이 두꺼워진 광장 끝은 샛길로 연결되어 있다.

경사진 길이 구부러지는 곳, 벽면에 석판이 붙어 있는 집이 있어 시선이 간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집이라는 내용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밀란 네랄리치’ 라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生家 터란다.

1900년 파리 올림픽 대회 사격부문의 동메달리스트였다고 한다.

이어진 경사로를 내려가니 튼튼한 석벽으로 지어진 집이 나타난다. 벽 위로 담쟁이가 뻗어있고 열린 창문으로 오렌지빛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이 시간에 보는 불빛은 먼 길 떠나온 여행자의 마음에도 집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언덕길을 내려가니 소리내며 흐르는 강이 있다.

강폭은 넓지 않은데 어둠 속에서도 드러나보이는 코발트색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요오드가 함유된 깨끗하고 치유력이 뛰어난 물로 Slunj에서 약 5km 떨어진 Plitvice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온천 중 하나 인 Slunjčica 강으로 이어진다고.

다리 건너 계속 가기에는 너무 어두워져서 그만 되짚어 돌아온다.

메달리스트 집 앞 나무에 매달린 꽃들이 달빛 속에 더욱 희게 빛나는 초저녁이 여물어 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 슈퍼에서 딸기와 감자를 고른다.

간혹 우리나라 슈퍼에 진열된 것중 큼지막하고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성장호르몬의 결과물 딸기와는 다르게, 작지만 야물다.

향이 어찌나 진한지, 나 어릴적 할머니께서 텃밭에 길러 따주시던 추억의 딸기 향을 소환시킨다.

크로아티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생가
강으로 내려가는 길
강 건너 동네로 이어지는 길 옆의 요새터
강으로 내려가는 길
Slunjčica 강의 물 빛
슬루니 마을을 감도는 Slunjčica 강

여행지에서 현지인에게 노출되는 한국인 이미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신다. 여행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꽃사과 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것과

향기 머금고 불어온 미풍에 볼을 맡기며

슬루니의 밤 정취를 만끽하는데,

현관 벨 소리가 난다.

주인아저씨가 집에서 구운 거라며 따뜻한 파이를 들고 2층 계단에 올라와 있다. 예상치 못한 환대라 당황한다.

저렴한 요금이 송구하기만 한 이 만족스러운 숙소에다, 처음 들어선 부엌 식탁엔 과일이 한바구니 놓여있었고, 거기에 빵까지 구워 올려주니 서둘러 우리도 보답할 거리를 챙긴다.


그렇잖아도 여행자는 나름 민간 외교관이란 생각에 출발 전 안국동에 가서 우리나라를 상징할 만한 것을 찾다가 오방색 천 파우치와 필기도구용 천 케이스를 열댓개 준비 해왔었다.

근데 파우치와 필기 케이스 주기에는 미흡한거 같다.

곁들여 우리의 비상시 에너지 충전용으로 준비한 초콜릿 바를 큰 봉지 째 들고 아래층 주인집 거실로 내려간다.(나중에 통째로 다 준것을 살짝 후회했다.)

마침 십대인 딸이 문을 열어준다. 뒤에서 넌지시 내다보시는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여행이란 ‘보러 갔다’가 얼마만큼은 자신을 현지인에게 ‘보여주고’ 돌아온다.

누군가에겐 우리가 최초로 보는 한국인이거나, 평생 동안 만나 본 몇 안 되는 한국인일 수도 있다. 남겨진 우리의 뒷모습은 내 뒤에 올 다른 한국인에 대한 현지인의 응대태도를 결정하는 先驗 정보일 터.

앞으로 호스트가 만나게 될 많은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히 담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