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300년경 로마 황제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거대한 성곽을 건설하면서 경제와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근세 들어 제1차 세계대전 후 리예카가 잠시 이탈리아로 넘어간 시기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 개발, 근대적인 항만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다행히 폭격의 피해를 받지 않아 유적들이 보존됨으로써.
1979년 유네스코는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안 궁전과 구시가지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했다.
현재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이자, 달마티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세계문화유산 궁전과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244년 ~ 312년)는 284년부터 305년까지 20년간 로마 황제로 재위했다.
원래 이름이 디오클레스인 그는 스플리트 근처 솔린에서 태어난 하층민 출신이었다,
전임 황제 누메리아누스가 전장에서 살해되자 경호 지휘관이던 그가 황제로 옹립되었고,
걸맞은 이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위키백과)
그는 특히 기독교도 탄압으로 유명한 황제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꾸준히 세력이 늘어나 사회집단으로 자리 잡았고,
교회 짓는 도시와 마을이 늘어 주교는 지역 사회 유력 계층의 일원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중앙집권적 전제정권 강화와스스로를 신성화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교집단'금지 정책을 시행,
기독교도, 마니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303년과 304년 마지막 탄압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기독교 탄압의 결과, 3000~3500명의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황제는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고향에다 295년부터 305년에 걸쳐 궁전을 건축했다.
유럽 각지에서 가져온 최상급의 대리석과 화강암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스핑크스, 기둥까지 가져와 장식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4개의 문과 16개 기둥으로 사각형을 이룬 궁전은 동서 215m, 남북 181m의 규모이며 총면적은 31,000㎡에 이른다.
디오클레티안 궁전의 원래 모습( 출처: Wikipedia )
재위 20년이던 305년 5월 1일,종신직인 황제의 직위를 내려놓고 자발적으로 퇴위했다.
생을 마감한 AD 312년까지 약 5~6년간 자신이 지은 이 황궁에서 만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채소를 가꾸며 권력보다는 자연에 묻혀 살기를 희망한 그의 말년은 녹록지 않게 흘러갔다.
그의 주요 정책인 '제2차 사두 정치'가 빠른 속도로 와해되면서 권력다툼에 휘말린 로마제국은 수많은 내전을 치르게 되었다. 사두 정치는 로마 영토를 동방과 서방으로 구분하여 각각 정제와 부제를 임명, 맡은 관할구역을 통치하게 하는 4인 통치 체제로, 정제 유고시 부제가 물려받게 되어있다.
치열한 투쟁의 와중에
4두 정치 부제 중 한 사람이었던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자신의 숙부이자 황제의 외동딸 남편이었던 갈레리우스 동방 정제의 사망으로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는 서방 정제들과의 권력쟁탈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황제의 딸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다이아는 당시 딸네 집에 와있던 황제의 부인 프리스카와 발레리아 모녀를 감옥에 투옥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자를 보내 이를 항의했다.
이에 다이아는 모녀를 석방하긴 했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오리엔트 지방으로 추방시켜버렸다.
아내와 딸이 추방된 시기에황제는 심리적 어려움을 겪다가 주위의 무관심 속에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野史는,
자신의 4두 정치체제의 처참한 실패와
가족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급 쇄락한 자신의 처지 등에 절망하여 자살했다는 추측도 전한다.
이후 다이아가 리키니우스와의 싸움에서 패해 죽자,
유랑 생활을 하던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는 다이아의 정적 리키니우스에게 의탁하러 갔지만,
그는 오히려 군사들을 보내 테살로니키에서 모녀를 살해했다.
황제 사후 1년 뒤, 313년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사후,
이 궁에는 다른 황제들이 머물렀었고, 7세기에 슬라브족이 정착하였으며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궁전은 비잔틴, 고딕 건축 양식 등의 화려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궁안의 대성당은 황제의 영묘 재료를 재사용하여 지어졌다.
12~13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중세의 요새,
15세기 고딕 양식의 궁전 및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기타 궁전 등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길이나 광장 등이 그때 만들어졌으며, 교회와 종탑 등이 추가로 건축되었다.
이제 그 궁을 거닐어 보기로 한다.
300년경에 세워졌다니 무려 1700년 이상의 세월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현재 약 3000명 이상의 주민이 실제로 거주하며, 여행자 숙소들도 궁 안에 있다.
유구한 역사를 안고 있는 유적이 전시용으로 박제되지 않고 현재도 삶의 터전이 되어 여전히 인간의 삶을 품어주는 점은 크로아티아 유적들의 큰 매력인 것 같다.
돌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는
숙박업, 음식점, 카페, 온갖 가게의 이용자들과 관광객들로
궁 안은 인파 가득, 생동감이 넘쳐난다.
오래되고 혹은 포화에 검게 변해버린 낡은 석벽 속을 뚫고 피어나는 야생화를,
석벽이나 성벽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강인한 생명력을 대물림한 이곳 사람들의 상징으로 오버랩된다.
남문과 리바 거리 그리고 지하궁전
궁전의 4방향 문은 각각 금속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중 리바 거리에서 궁안으로 들어가는 남문, Bronze gate는 원래 바다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바다 건너 들여오는 물자 이동 통로 역할을 했다.
지금은 리바쪽으로 나있는 상가 출입구처럼 보여 지나치기 쉽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궁전, 계속 직진하면 열주 광장과직선으로 이어진다.
지하층은 바로 위에 있던 황제의 숙소와 동일한 구조로 건축되었고, 예전에는식당, 와인 및 곡식 저장 창고 등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아치 천정의 회랑들이 있고 액세서리와 예술품, 공예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바다와 성벽이 접해있던 궁의 남쪽은 육지로 넓혀져,
낡은 성벽에 덧대어진 건물들과 리바 거리가 바다 사이에 들어서 있다.
성 벽 높이는 원래 22m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높이를 찾아볼 수 없다.
궁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남쪽 성벽에 덧대어 지어진 오늘날 리바거리의 상가와 주택들
궁전의 지하 (구글)
열주 광장과 알현 대기실
지하에서 올라오면 그 앞이 열주 광장이다.
일층은 예전의 황제 알현 대기실이 있다.
둥근 원통형의 소리 공명을 이용하여 음악인들의 공연이 있는 장소로도 이용된다고.
중앙 아치 아래 발코니가 황제의 연설대 자리, 그 뒤로 알현실, 발코니 아래는 지하 궁전과 리바 거리 연결 통로
지하에서 건물 밖으로 나오니 광장은 기둥으로 둘러 쌓인 사각이다.
황제의 구역으로 집무를 보거나, 행사, 회의를 하던 장소였으며 궁전의 중심이 되는 곳이란다.
남북으로 35m, 동서로 13m 넓이다.
6개의 석회암 기둥이 열 지어 있으며 프리즈로 장식된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기둥을 세운 뒤 다시 석회암으로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으로 궁전을 건축했다.
관광객들이 한 번은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궁 관광의 중심지이며 궁과 함께 관광의 핵심인 성 도미니우스 성당과 종탑을 오르는 출입구가 있다.
성당 맞은편 노천카페 룩소르가 있고
많은 공연이 열리는 장소라,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열주 광장. 왼쪽 기둥 뒤로 성 도미니우스 성당과 종탑 출입구가 있다.
열주 광장 인근의 카페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 : (Katedrala Svetog Duje)
309년까지 계속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인 탄압 정책은 그가 이 곳에서 죽은 후 1년 뒤인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폐기되었고 이후 기독교인들은 탄압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황제의 시신은 사후 170년간 궁의 영묘에 묻혀있었으나, 기독교인들의 철저한 배척을 받았던 터라, 기독교의 세력 확장과 함께 어느 시기에 시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초상과 유품도 함께 파괴되거나 훼손되어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안 황제의 영묘에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이 지어졌다.
성당은 7세기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완공된 이후 지금까지 재건축 없이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성당 안, 황제의 영묘를 덮고 있던 팔각형 돔이 남아 있으며
성당의 주제단 앞 돌바닥에는 170년간 묻혀있던 황제의 시신 대신 스플리트의 초대 주교이자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도미니우스의 석관이 모셔져 있다.
도미니우스는 황제 시대 박해로 순교한 성인으로 솔린(Solin)의 주교였다. 순교당한 사람이 자신을 순교시킨 황제의 자리에 모셔져 있는 '운명의 뒤바뀜' 장소이다.
배교 아니면 순교, 둘 중 택일이었다는 황제 탄압 정책으로 인한 기독교도들의 처절한 고뇌가 읽히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성 아나스타시우스(St Anastasius)의 제단이다.
이 지역 예술가 유라이 달마티나체(Jural Daimatinac)가 1448년에 완성한 것으로, 당시 달마치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에 속한다고 한다.
성당 지하 예배당 한 중앙에 있는 304년에 순교한 성 루치아(Saint Lucy)상
1908년 재건될 당시 수많은 장식들이 제거되었으나, 사자상과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스핑크스 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자상은 황제의 영묘를 지키고 있었으나 지금은 성당 입구에 놓여있다.
오른쪽 발톱으로 양 한 마리를 움켜쥐며 로마제국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성당 내부, 황제의 영묘를 덮었던 8 각형 돔 하부, 천장 가까운 띠 모양의 석조 장식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황비 프리스카(Prisca)의 부조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부분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영묘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시신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시신을 지키던 사자상은 궁의 역사와 함께하며 쇠락한 외모로 변했지만
여전히 호기롭게 입 벌리고 오가는 관광객들을 지켜보는 모습은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대박해 시대'라 일컬어질 만큼 수많은 순교자를 낸 전제 황제와,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짓을 단념할 텐데."라면서 퇴위 1년 후 자신에게 황제 복위를 권유한 것에 응답했다는 농부는
동일인이 맞는 걸까?
황제직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채소나 키우며 살고자 했던 은퇴자의 말로는,
거품처럼 꺼져버린 권력으로 가족을 불의에 잃음은 물론,
170년을 자리 잡고 있던 곳에서 자신의 시신마저 오리무중으로 증발해버린 역사만 남긴 채,
그가 지은 궁전만 1700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이름을 달고 세계인의 볼거리가 되어있다.
황제의 영묘를 지키던 사자상
왼쪽 각 진 지붕이 성 도미니우스 성당 지붕. 오른쪽 종탑
열주 광장에서 올려다본 종탑
사자상 근처 기둥 앞에 엎드려있는 검은색 스핑크스가 있다.
이집트를 떠나 온 지 1700년, 아직도 고향을 그리워할까?
스플리트 어디서나 보이는 57m 높이의 종탑은 스플리트의 상징과도 같다.
13세기에 건립되었으며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종탑은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종탑으로 올라가는 183 계단은 비좁고 가파르다.
아래 사진들은 종탑에서 내려다본모습이다.
오른쪽 둥근 부분은 알현실 뚫린 천정부분
종탑에서 내려다본 열주 광장과 룩소르 카페
성 도미니우스 성당 지붕 너머의 시가지
종탑 맨 위층의 모습
건너편 삼각형 산에 마르얀 전망대가 있다.
궁 남쪽 리바 거리와 선착장 그리고 저 멀리 크루즈 선착장
크로아티아 시인 마르코 마룰리치 (1450 년 8 월 18 일 – 1524 년 1 월 5 일
마르코 마룰리치(Marko Marulic)는 크로아티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로 그의 시는 크로아티아 문학의 효시로 여겨진다. 크로아티아의 민족 시인으로 여겨지며 "크로아티아 중세 시대의 crown(시인에게 씌워주던 왕관)"이나 "크로아티아 르네상스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그는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Marulić 는 달마티아 스플리트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삶에 대해 실제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고향에서 인본주의 학자 Tideo Acciarini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던 것이 확실하며 그 후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을 졸업한 후 그의 고향에서 그의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추측한다.
한때 60세 때 스플리트 앞바다의 숄타섬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2년 뒤 스플리트로 되돌아왔다. 판사, 공증인의 심사관 및 유언 집행자 역할을 하면서 법률 업무를 수행했고 그의 작업 덕분에 그는 스 플리트에서 인본주의 계의 가장 저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강조했으며 스토아 철학에 대한 예찬을 반영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어로 쓴 대표적인 시 '유디타(Judita)'는 최초로 활자화된 크로아티아 문학작품으로 6편으로 이루어진 서사시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구약시대의 여주인공을 통해 국민들에게 반 터키 투쟁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들은 라틴어로 써져 유럽의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화폐 500쿠나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