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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Sep 09. 2020

크로#18. 스플리트1:도시를 한눈에 마르얀 전망대

길에서 만난 사라예보인, 그리고 코소보 사태

트로기르를 떠나는 날,

오늘따라 카메를랭고에서 경연대회가 있는 듯 여러 연령층의 참가자들이 단체복을 갖춰 입고 속속 성으로 모여들고 있다.

Festival이라고 쓰인 입간판, 꾸며진 무대, 배열해 놓은 간이의자 그리고 요새 안의 성벽과 바닥, 여기저기를 꽃들과 꽃꽂이 작품으로 장식해놓은 모습이 제법 큰 행사인 듯하다.

경연대회를 보고 싶지만 스플리트로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아쉬움을 안고 요새 밖으로 나온다.


트로기르에서 스플리트까지는 버스로 35~45분 정도가 소요되며 배차시간이 30분이라고 한다.

(당시에 알았더라면 치오보 섬에서 1시간 소요되는 배로 스플리트에 갔었을 것이다. 현재 요금은 버스 23쿠나보다 약간 비싼 34쿠나이며  이 배는 리바 바로 앞에 정박한다고. 예약 사이트는 https://buraline.com)

Bura Line  사이트 발췌


스플리트 입성

11시 3분 출발한 버스는 금세 스플리트 시가지로 접어든다.      

수도 자그레브 다음으로 큰 도시라더니 여태 지나온 도시 중에서는 규모가 제일 커 보인다.

버스터미널, 훼리터미널, 기차역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지도에서 보긴 했는데

푸른 바다 위, 거대한 크루즈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코 앞에서 맞닥뜨린다.


해상교통의 요지란 스플리트의 지정학적 위치가 체감된다.

우리로선 웬만해서 볼 수 없는 대형 크루즈들 위용에 자꾸 시선을 뺏긴다.

일정이 여유롭다면 이 여객선을 타고 이태리 안코나까지 (9~ 11시간 소요) 갔다 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태리 외에도 페스카라(Pescara), 리예카(Rijeka), 코르출라(Korcula),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믈레트섬(Mljet)행 정기 페리선이 있고, 북쪽으로 트로기르를 비롯하여 아드리아해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솔타, 비스, 브라차, 흐바르의 스타리그라드 행 여객선들도 운행된다고.

버스터미널 바로 뒤쪽은 기차역이다.

버스, 기차, 선박 3가지 터미널이 한데 모여 있으니 초행자 도시접근이 수월할 듯하다.


터미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리바 거리까지 약 500m, 도보 7분으로 지도에 표기되어 있더니 구시가지 성탑도 바로 눈앞인 듯 가깝다.


그러니 느긋하게 새 도시를 오감으로 느끼며 걸음을 뗀다.

대형 크루즈 (구글)


리바 거리 야자수 줄기 두께로 보아 이 도시는 어지간히 기온이 높은 가보다.

디오클레티안 성벽에 기대어 많은 상점들이 있고 광장에는 마침 노천시장이 열려 있다.

젊은 직원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응대하는 모습과 이곳을 누비는 여러 나라 관광객들 모습으로 거리는 온통 축제마당 분위기다.



스플리트의 숙소

성 가까운 구시가지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숙소를 예약했던 터라,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해졌다.

숙소 골목길 사진을 출력해간 덕분에 사진을 보여주니 앞장을 선다.

오래된 석조 도로가 울퉁불퉁해서 무거운 가방 끌고 가는 것이 힘들어 보였는지

안내해주던 현지인이 내 가방을 끌어주겠다고 한다.


땀을 좀 빼다가 당도한 숙소는 오래된 개인 주택을 개조한 4층 집이다.

리셉션이 없고 건물 입구 초인종을 누르면 예약번호를 확인한 후, 문이 열리고 이어 좁은 계단을 통해 건물로 진입할 수 있다.

겉으로는 낡은 집이지만 내부를 잘 꾸며놓아서 거실과 부엌 등 모든 공간의 기능성이 잘 고려되어 있다.

호스트의 관리도 탁월하다. 고급 호텔처럼 게스트가 도시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폰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준비된 인쇄물에는 선박을 비롯한 대중교통 시간표와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그래서 요즘도 여전히 그 숙소는 평점 9.7 이상을 상회하고 있고, 예약 일정이 꽉 잡혀있는 것을 본다. 우리나라의 많은 여행자 숙소 운영자들이 그분의 방식을 벤치마킹하면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민가에 깊숙이 위치한 덕에, 창문을 여니 주변 풍광이 친밀하게 선뜻 다가온다.

문화재인 성당 첨탑이  불과 몇 m 이내이고

창문 바로 아래 펼쳐진 이웃집 옥상 풍경도 내려다볼 만하다.

좁은 터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정성으로 커가는 넝쿨 식물들로 이뤄진 미니 파콜라,

그 그늘 아래 자리한 약식 식탁, 올망졸망 화분에 담긴 이름 모를 꽃들이 키 자람 순을 한껏 위로 뻗어 올리고 있는 모습 등이 펼쳐져 있다.

이웃집 주민들 몇 이서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 소리도 들린다.

주민과 교류는 못해도, 그들의 삶을 숙소 인근 환경을 통해서나마 보고 느끼자는 것이 여행지 숙소 선택의 우선순위였다.

다행히 가는 곳마다 우리 의도를 만족시켜 주는 숙소들임을 확인하는 행운이 계속되는 중이다.  

숙소 찾는 수고와 바꾸는 만족감 비중이 매우 크다.  숙소도 여행의 밀도를 높여주는 한 요소이니까.


일단 호스트의 추천대로 마르얀 전망대를 먼저 보고 성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숙소  (구글)
숙소 전망(구글)
창문 너머 동네 풍경

 

마르얀 전망대    

호스트의 안내를 떠올리며 마르얀 공원길에 접어든다.

보통은 리바 거리에서 바다를 끼고 계단으로 올라오는 남쪽코스를 이용하지만

우리는 공원 북쪽의 요트장과 해수욕장을 보며 걸어 오르다가 공원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규모가 제법 큰 공원의 수목들 사이를 걷는 맛이 또 한몫한다.

경사면을 돌로 층을 쌓아 나선형 길을 만들어 놓은 흙길은 소나무 잎이 푹신하게 깔려있어 걷기가 좋다.

수령이 제법 됨직한 숲길한적한 공원은 더없이 훌륭한 산책로이다.


돌만 뒹구는 성 베네딕트 성당 터를 지나서 길은 점차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드디어 송신탑 비슷한 철탑 근처에 이르니 산꼭대기에 벤치가 하나 있고 그 앞을 남쪽 가파른 절벽을 막아주는 철망이 쳐져있다. 아마 호스트는 이곳이 뷰 포인트로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던 것 같다.

의자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시원하게 잘 내려다보이는데

관목으로 남쪽 동쪽 시가지가 가려진다.

마르얀 전망대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동물원을 지나 조금 내려가니 널찍한 마르얀 전망대가 나타났다.

국기가 게양되어 있어서 아래 시내 거리 어디서도 잘 올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관광객들이 자리를 옮겨가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스플리트 구시가지 그리고 아름다운 열대 목과 함께 바다에 열려있는 테라스 같은 리바 거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헤치며 나가고 들어오는 많은 여객선과 화물선들은 여러 섬을 운항하는 선박들로,  크로아티아 선박회사 로고가 선명하다.

전망대 주변길

<전망대에서 본 풍경 >

마르얀 전망대

푸르디푸른 바다에 하늘마저 마냥 푸르른데

그 위를 떠 가는 크루즈 흰색 색감 대비가 청량감으로 풍광의 정취를 한층 고조시킨다.

멀리 아기자기한 디오클레티안 성과 골목들, 점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의 이동이 흥미롭고

바닷가에 면해 지어진 멋들어진 주택들과 그에 딸린 수영장도 좋은 눈요기 감이다.

전망대 바로 아래 동네, 크로아티아가 낳은 유명 작가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1883.8.15.~1962.1.16)의 미술관도 찾아본다.


더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망대를 내려온다.

얼핏 지나치기 쉬운 작은 성 니콜라스 성당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한참 내려오다 보니 리바길로 이어지는 남쪽 계단길이 보인다.


길에서 만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부부.

아래쪽에서 관광객들이 올라오고 있다.

중간 뷰 포인트 임직 한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침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중년 부부도 그 지점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눈치다.

부부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자 고맙다며 포즈를 취한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다.      

“어디서 오신 거죠?”

“ 한국이요.”

“아유 먼 데서 오셨네요. 우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왔어요.”

아, 익숙한 지명이다.

1973년, 이 에리사 탁구선수가 그 시절에는 아주 드물게 국제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우리 국민은 한동안 이 지명 하나로 애국심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이다.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를 낯선 지명이었지만 단지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우호적인 마음이 되었던 그 이름, ‘사라예보’ 인을 만난 것이다.

금방 반가움이 번지면서 예의 핑퐁게임과 우승자 얘기를 슬쩍해보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히 기억할 리가 없다.

당시 사라예보는 유고 연방에 속해있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 부모를 둔 티토가 유고연방을 이끌다 서거하자 유고연방 탈퇴 과정에서 일어난 90년대 발칸의 전쟁은 10만~11만 명이 사망하고 220만 명난민이 발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치명적인 전쟁으로 일컬어진다.

1차 대전 때부터 시작된 ‘민족청소’라고 표현되는 참혹함을 서로에게 되갚는 잔인한 참상을 당시 TV 뉴스로 그리고 후에 영화로 다.

‘보스니아’라는 이름 만으로도 내내 다.

남편은 건축가, 부인은 도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그들과 나중에 서로의 나라를 여행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헤어다.


여행 후,  그 날 교환한 이메일로 찍었던 사진을 보내주었더니 답장으로 자신들의 집 주변을 사진 찍어 보내오기도 했는데 여행 이후 내게 여러 일들이 생겨서 답하지 못다.

답장여전 숙제다.

(아직도 기다리는 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여행지의 숱한 만남 속에 나눈 사소한 말도

약속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기에...

바닷가 끼고 전망대 오르는 길

이제 스플리트의 진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으로 향한다.   

보스니아의 비극, 코소보 사태는,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발칸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국가는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는 7세기에 나라를 세운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강력하게 일어난 오스만 튀르크에게 무너지자, 그 틈을 타서 세르비아가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르비아 역시 1355년 듀샨왕의 전성기를 지나고 나서,
1389년 코소보에서 오스만 튀르크에게 격파당하면서 추락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였던 알바니아 주민들을 동방정교회인 코소보에 이주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코소보 주민의 80% 이상이 알바니아계 무슬림인이다.
 
이러한 배경은 코소보 분쟁 원인으로 작동한다.
세르비아는 예전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하는 세르비아즘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던 중에
이를 견제하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다 일어난 황태자 저격 사전은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에는 연합국에 의하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을 만들어졌고 여기에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 일부가 합쳐져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
이때, 이 지역을 침범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크로아티아에 이주시켰고
(현재도 크로아티아 도시 중에는 이탈리아인 집단 거주지역이 있다.)
독일은 크로아티아의 꼭두각시 정권인 우스타샤로 하여금 70만 명의 세르비아인과 집시들을 학살, 추방토록 했다.

이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만들었다.
그는 민족 간의 결혼을 장려하며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80년 티토 서거 이후 유고슬라비즘의 실험장이었던 보스니아에서 민족 간 갈등이 터졌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1991년 6월 25일 독립하자,
유고연방군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세르비아계 장교들은
세르비아니즘을 부활시키자는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세비치의 주도 하에 6월 28일 슬로베니아로 쳐들어갔다.

유고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10일간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돈을 약탈해간 이들은 8월에 진격을 이어갔다.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의한 70만 명의 세르비아인 학살에 대한 보복적 측면도 있었다.
즉, 1차 대전 후 일어난 세르비아인 대학살의  ‘민족청소' 앙갚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의 대통령인 밀로세비치의 잔인성이 부각되었다.
1992년 4월 6일에는 보스니아 시민들이 사라예보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평화와 유고연방 탈퇴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이 총격을 가해 보스니아 내전을 시작했다.
3년 3개월간 계속된 보스니아 내전은 동적 상잔의 잔인한 전쟁이 되어갔다.
전쟁 초기에는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가 서로 연합하여 세르비아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였고 무슬림 사령부가 가톨릭 지역에 있을 정도로 문제가 없었으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정치인들의 야심이 개입되어 편 가르기 식 적대적 입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참혹한 민중의 깊은 아픔으로 남았다.

1995년 전쟁이 끝난 후,
날마다 어린 아들의 묘가 있는 마을 입구의 묘소에 와서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흐느끼던 어머니들의 눈물 어린 나날을 TV에서 시청했고
바로 이웃간에 적이 되어 서로의 가족을 잃고 일상생활을 박탈당한 수많은 보스니아 인의 애절한 전쟁 상흔을 다큐 프로를 통해 가슴 절이며 보았었다.

이 전쟁 중에
세계평화 주도를 내세우는 유럽 강대국들은
자국 이익에 따른  입장 차이로
이 전쟁의 피해를 줄이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민족청소를 유발한 것도,
제 살던 땅에 이민족을 강제 유입시킨 것도
그들이 벌인 일이 아닌가!
그리고
종교가 달라도 민족이 달라도 그렁저렁 살고 있던 발칸의 평화가 이렇게 잔혹하게 깨져버린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음에도
시대를 거슬러 지는 국가간 윤리적 책임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념도 종교도 정치적 노선도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박탈할 이유로서 성립될 수 없음에 대한 정치의 진화는 희망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인류는
전쟁을 통해 서로를 아픔 속에 몰아넣는 참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역사는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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