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채우는 사람이 없는 직업, PD
나는 도대체 PD를 몇 살까지 해야 할까.
이 질문을 한 번도 안 해본 PD는 없을 거다. 촬영 끝나고 새벽에 혼자 장비 챙기면서, 편집본 리뷰 받고 나서, 기획안이 또 엎어지고 나서.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근데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 답이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니라, 같은 감각도 연차마다 완전히 다른 신호이기 때문이다.
"재미없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주니어의 재미없음은 적성 신호일 수 있다. 이 일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몸의 반응. 이때는 빠르게 다른 방향을 찾는 게 현명하다. 억지로 버티다 3년을 날리는 것보다.
시니어의 재미없음은 다르다. 번아웃일 수도 있고, 성장 정체일 수도 있다. 번아웃이라면 환경을 바꾸면 다시 살아난다. 성장 정체라면 더 넓은 역할, 더 큰 결정권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신호다.
같은 감각, 다른 답. 연차를 빼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유다.
고민을 네 가지로 나눴다. 재미없다, 나의 역량에 자신없다, 다른 방향이 보인다, 체력이 지쳤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간다.
역량 자신감 부족은 성장의 증거인 경우가 많다. 특히 주니어일수록.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인다는 건, 세상을 더 잘 보게 됐다는 뜻이다. 임계점 전이다. 더 해보면 된다.
반면 시니어가 역량 자신감을 잃었을 때는 신호가 다르다. 제작의 세계는 항상 더 젊고 트렌디한 사람이 나온다. 그 레이스를 계속 뛸 필요가 없다. 방향을 바꿀 때다.
체력 소진은 직무 문제가 아니라 환경 문제인 경우가 많다. 주니어든 시니어든 마찬가지다. PD는 누구보다 소진이 큰 직업이지만, 체력이 지쳤다는 감각은 대부분 조직 구조나 일하는 방식에서 온다. 직무를 바꾸기 전에 환경을 먼저 바꿔보는 게 순서다.
30대 예능 PD로 일하던 지인이 있었다. 체력적 소진이 컸고, 결국 라이브커머스 PD로 직무를 바꿨다. 그런데 업무 강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틱톡 PD, 크리에이터형 PD로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꿨다. 깊은 기획보다 트렌드와 밈에 맞닿은 짧은 호흡의 콘텐츠, 본인이 직접 출연하는 방식. 그때서야 워라밸을 찾았다고 했다. 소진의 원인이 직무 자체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주니어라면 더 해봐야 한다. 힘들어서 보이는 건지, 진짜로 끌리는 건지 구분이 안 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후회로 이어진다. 시니어라면 다르다. 그 눈 자체가 이미 자산이다. 지금이 전환점이다.
방송국에서 조연출로 일하던 30살 지인이 있었다.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26살 조연출들과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교했다. 결국 2년차에 콘텐츠 마케터로 이직했다. 그 이후 이 분이 한 말이 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할걸.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 역량에 자신없는 주니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직이 아니라, 더 해보는 것이다.
나는 인하우스 PD였다. 영상을 만드는 것보다 기업의 페인포인트를 발견하고 그걸 콘텐츠로 푸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게 나를 인하우스로 이끌었고, 그게 나를 결국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토스에서 채용 브랜딩 팀으로 옮겼을 때였다.
당시 토스에는 채용 이야기를 할 SNS 채널 자체가 없었다. 채용 전략은 있었지만 그걸 어떻게 브랜딩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은 부재했다. 채널을 만들기 전에 채널 전략을 짜야 했고, 채널 전략을 짜기 전에 채용 브랜딩의 방향 자체를 설계해야 했다.
0에서 시작하는 작업이었다. 콘텐츠 하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콘텐츠들이 나올 수 있는 세계관 전체를 짜는 일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단순히 재미있다는 게 아니었다. 내가 원래 이쪽 사람이었구나, 라는 감각. 브랜드 전체를 하나의 언어로 설계한다는 것. 나무 한 그루를 잘 찍는 것보다 숲의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게 나였다.
나는 시니어였고, 다른 방향이 보였고, 그게 힘들어서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못하는 걸 피한 게 아니었다. 더 잘하는 걸 찾은 거였다.
"나는 도대체 PD를 몇 살까지 해야 할까"는 사실 틀린 질문이다.
맞는 질문은 이거다.
나는 실행하는 사람인가, 설계하는 사람인가.
실행하는 사람은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설계하는 사람은 그 콘텐츠가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둘 다 필요하고, 둘 다 어렵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는 건 없다.
다만 자신이 어느 쪽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걸 아는 데 나는 꽤 오래 걸렸다. 이 글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