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오늘을 살아가는 날에
희망은 가장 눈부신 순간, 가장 잔인하게 부서졌다. 그날은 종현이 우현을 위해 예쁜 유리 오르골을 선물한 날이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작은 돌고래가 들어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그가 태엽을 감자, 맑고 청아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우현이를 위해 준비했어요. 소리를 좋아할 것 같아서.”
종현의 순수한 선의였다. 하지만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우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그 낯선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깨뜨리는 날카로운 소음이었다. 아이는 귀를 막으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고, 이내 온몸을 뒤틀며 끔찍한 경기를 일으켰다.
“우현아!”
린은 순간 표정을 지웠다.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비명처럼 종현을 밀치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의 입에 손수건을 물리고, 기도를 확보하고,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내 약물을 주입하는 그녀의 손길은 기계처럼 정확했지만, 그 끝은 절망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몇 분 만에, 끔찍할 정도로 능숙하게 이루어졌다.
방 한구석에서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현은, 자신이 선물한 희망이 일으킨 참혹한 결과를 마주했다. 그가 낭만적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의 삶, 그 이면에 숨겨진 이토록 처절한 전쟁을, 그는 처음으로 목격했다.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거대한 고통 위에 피어난 찰나의 꽃에 불과했다.
우현이 겨우 안정을 되찾고 색색거리며 잠든 후, 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오르골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종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린의 손을 잡았다. 땀으로 축축한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해요,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요.”
그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절하게 말했다.
“내가 도울게요. 제발… 나한테 기대요. 좋은 시설도 알아볼 수 있고, 당신 다시 공부해야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우리 같이 떠나요. 이렇게 살게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고, 절박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린은 깨달았다. 그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우현은 문제가 아니었다. 우현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고, 그녀가 지켜야 할 세계의 핵이었다. 그 세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사랑은 현실을 대체할 수 없었다.
린은 잡힌 손을 조용히 빼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물조차 사치인 듯, 너무나도 선명한 슬픔을 담은 눈으로 종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종현 씨는 내가 아주 오랜만에 꾼, 너무 생생해서 진짜인 줄 알았던 꿈이에요. 하지만 난 여기서 깨야 해요. 내 현실은, 이 아이예요. 당신의 카메라는… 결국 여길 온전히 담을 수 없어요. 미안해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종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뒤, 말없이 모든 장비를 챙겨 떠났다. 그녀는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그저 창문 뒤에서, 그의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떠난 후, 집 우편함에는 작은 고래 모양 USB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일 년이 흘렀다. 린의 일상은 다시 예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 우현과 함께 종현이 남기고 간 USB를 연다는 것뿐이었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 녹음된 고래들의 노랫소리가 들어 있었다. 우현은 그 깊고 낮은 소리를 들을 때면 드물게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늦은 밤, 린은 작은 노트북으로 해외 다큐멘터리 영화제 소식을 보고 있었다. 대상을 받은 작품은 은종현 감독의 ‘경계의 노래’였다. 턱시도를 입은 종현이 트로피를 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위대한 사랑을 목격할 기회를 주신 한 분께, 이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린은 소리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파도 소리는 일정했다. 그녀는 잠든 우현의 방으로 들어가, 곁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자신이 평생 듣고 싶어 했던 가장 깊고 간절한 고래의 노래는, 먼바다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옆에서, 이 작은 방 안에서 함께 잠들어 있다는 것을.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사랑을 지켜낸 것이었다. 창문에 이마를 기대자, 차가운 유리 너머로 그녀가 떠나보낸 세상의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