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부지불식 찾아오는 로맨스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의 향과, 방금 인쇄된 제안서의 잉크 냄새가 13층 회의실의 공기를 채웠다. 형광등 불빛이 하얀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부서졌다. 지수는 방금 광고 PT를 마친 참이었다. 클라이언트인 중년의 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고, 그 옆의 대리는 의미 없이 펜만 딸깍거렸다.
‘저 부장님… 넥타이 무늬가 의외로 귀여운데. 강아지 발바닥이잖아?’
지수의 머릿속 시나리오가 스위치를 켜듯 작동하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고 일에 미친 사람이지만, 사실은 유기견 센터에서 몰래 봉사활동을 하는 거지. 주말 데이트는 당연히 봉사활동. 땀 흘리고 흙투성이가 된 채로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 거야. "지수 씨, 이 녀석 좀 봐요. 귀엽죠." 그 갭모에에 나는 반해버리고….’
“한 팀장님.”
부장의 목소리가 지수의 망상을 날카롭게 갈랐다.
“네, 부장님.” 지수는 0.3초 만에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했다.
“결국 이 콘셉트는, 예산이 두 배라는 소리네요.”
아. 망했다. 지수는 잉크 냄새가 지겨워진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로맨스는 끝났다. 강아지 발바닥은 그냥, 딸이 사준 넥타이일 뿐일 거다.
광고 마케터인 지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환상을 빚어내고, 그 환상을 대중에게 파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일상에서도 이 ‘환상 빚기’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레이더는 나이와 성별,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뇌의 한쪽에서는 자동으로 ‘만약 저 사람과 연애한다면?’이라는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이것은 병이라기엔 유쾌했고, 취미라기엔 강박적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론칭하는 앱은, 기존의 배달 앱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를 구축할 겁니다!”
일주일 뒤, 지수는 성수동의 한 공유 오피스에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의 스타트업 대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열정으로 달아오른 그의 뺨은 붉었고, 후드티 소매는 너덜너덜했다. 탁탁탁,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방금 로스팅한 원두가 터지는 소리처럼 경쾌했다. 강한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 향과 젊은 열기가 좁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와, 어리다. 파릇파릇하네.’
시나리오가 다시 시작됐다.
‘연애를 한다면, 분명 새벽 세 시에도 "누나! 대박 아이디어 생각났어!" 하고 카톡을 보내겠지. 데이트는 홍대 아니면 연남동. 힙한 편집숍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조금만 지루해하면 금방 눈치채고 손을 꽉 잡을 거야.
"누나, 피곤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툴툴거리면서도 그 열정에 감염되어, 나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거지. 밤새도록 앱 개발 얘기를 듣다가, 일 얘기만 한다고 토라지면… 서툴게 입을 맞추려나.’
지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닦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대표가 지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은 막 론칭한 앱 아이콘처럼 반짝였다.
“네, 그래서…?”
“저희 예산은, 사실상 인플루언서 마케팅 비용이 전부입니다. 5백만 원이요.”
지수의 눈에 반짝이던 필터가 싹 걷혔다. 새벽 세 시의 카톡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누나, 돈 좀 빌려줘요’ 일 수도 있다. 서툰 입맞춤 대신 서툰 견적서가 날아올 것이다. 지수는 가장 프로페셔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 그 예산으로는 생태계를 구축하기보다, 일단 작은 연못부터 파보시는 게 어떨까요.”
다음 미팅은 광화문의 초고층 빌딩 32층이었다. 방금의 혼란스러운 공유 오피스와는 다른 차원의 공기가 흘렀다. 바닥은 소리 없이 카펫에 발이 감겼고, 은은한 삼나무 향과 값비싼 콜롱 냄새가 났다. 제안서를 검토하는 대기업 상무, 이은성은 흠잡을 데 없는 짙은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제안서를 넘기며 안경을 고쳐 썼다. 잘 관리된 손가락과, 손목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제안이군요, 한 팀장.”
그의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의 울림이 지수의 고막을 간질였다.
‘어른 남자다.’
시나리오는 즉각 장르를 변경했다. 멜로. 그것도 아주 클래식한.
‘이런 남자와의 연애는, 시끄러운 곳은 피해야 해. 흰 테이블보가 깔린 클래식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는 거지. 그는 내 일에 대해 묻고, 진심으로 조언해 줄 거야. 아마… 첫사랑에 실패한 깊은 상처가 있겠지. 나는 그의 상처를 유일하게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여자가 되는 거야. 가끔 그가 "지수야" 하고 낮게 부를 때면, 그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긴장이 풀릴 것 같아. 그는 분명….’
“제 딸아이도 지수 씨랑 동갑이라,”
“네?”
상무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트렌디한 감각을 좋아할 것 같네요. 우리 딸이 얼마 전에 광고 회사에 들어갔거든요. 나중에 한 팀장님하고 밥 한번 먹게 해야겠어요.”
지수의 머릿속에서 클래식 레스토랑의 현악 4중주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지수야’가 아니라 ‘우리 딸 친구’라니. 지수는 서둘러 제안서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아, 네. 다음은 저희가 제안하는 바이럴 전략입니다만….”
연달아 두 개의 시나리오를 말아먹은 지수는 탈진 상태로 카페에 들어섰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골목 안쪽의 작은 로스터리 카페였다. 문을 열자마자 톡 쏘는 산미가 강한 원두 냄새와, 우유 스팀의 비릿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따뜻한 라테 한 잔이요.”
바리스타는 대답 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무심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커피 머신을 쥔 팔뚝에 섬세한 타투가 가득했다. 그는 지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우유를 스팀 피처에 부었다. 치이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까칠하네.’
하지만 지수의 시나리오 엔진은 멈출 줄 몰랐다.
‘전형적인 츤데레. 까칠한 예술가 타입.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속은 따뜻하겠지. 연애하면? 매일 아침 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려줄 거야. 내가 감기에 걸리면, 툴툴거리면서도 유자차 같은 걸 끓여주겠지. "일 좀 적당히 해라, 멍청하게." 하면서. 조용한 걸 좋아해서 데이트는 그냥 이 카페에서 마주 앉아 각자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겠지. 그 눈빛….’
지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때였다. 바리스타가 라테 아트를 완성하고는, 컵 받침에 작은 쿠키 하나를 툭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건넸다.
‘… 역시! 쿠키까지! 완벽한 츤데레야!’
지수가 잔을 받아 들려던 순간, 안쪽에서 다른 남자 직원이 나왔다. 그러자 방금까지 얼음장 같던 바리스타가 그 남자 직원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이거 서빙 좀. 나 손님 거 쿠키 빼먹을 뻔했잖아.”
“어휴, 정신없긴. 이리 줘.”
지수는 손에 들린 라테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스팀 밀크처럼 부풀었던 가슴이 사르르 꺼졌다.
카페를 나온 지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라테는 썼지만, 끝 맛은 고소했다. 이게 다 일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직업은 어쨌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직업병일 뿐이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 옆에 배달 앱 로고가 박힌 헬멧을 쓴 남자가 오토바이를 세웠다. 헬멧 바이저 사이로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대가 보였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그의 손가락이 핸들을 까딱까딱, 리듬을 탔다.
‘…저 사람은 어떨까. 낮에는 배달 라이더, 밤에는 인디 밴드 베이시스트인 거야.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비 오는 날 길고양이를 챙기는…’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지수는 경쾌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시나리오는 다시, 막힘없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