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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by 지나온 시간들

제임스 형한테 전화가 왔다.

"토요일에 뭐해? 별일 없으면 밥이나 먹자."

당시 나는 20대 후반이었고 한인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한인교회에는 청년부 모임이 있었는데 제임스 형은 그중 나이가 제일 많았다. 토요일에 형이 나를 데리러 왔고 오랜만에 LA 다운타운에 있는 코리아타운에 가자며 차를 몰아 한인 식당으로 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형, 누가 또 와?"

"응, 한 명 더 와. 올 때가 됐는데."


잠시 후 우리 테이블로 누가 와서 제임스 형 옆에 앉았는데, 6개월 전쯤에 새로 청년부에 들어온 자매였다.

그 자매는 나하고 동갑이었는데 그냥 가볍게 얘기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인사하고 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둘의 사이가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닌 듯했다.

"뭐야, 이거. 두 사람 어떤 관계야? 빨리 실토해."

내가 물었더니 제임스 형이

"아, 역시 눈치 빠르네."

하고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6개월 전 그 자매가 청년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제임스 형은 그 자매에게 관심이 많아 사귀기 시작했고 진도가 빨리 나가 결혼하기로 하고 부모님께 허락받아 날짜도 잡았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벌써 다 끝났는지.

그러더니 형은 나보고 말했다.

"사실, 너한테 신랑 들러리 부탁하려고 밥 먹자고 한 거야. 그리고 결혼식 날 운전도 네가 다 해주었으면 좋겠어."

"난, 들러리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걱정하지 마.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물었다.

"여자 들러리는 누구야?"

"아, 여자 들러리는 Elaine이라고 너 형수될 이 사람 직장 후배야. 중국계 미국인이야."

"아, 그래?"

하고는 나는 뭐 별일도 아닌 것 같고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결혼식 날이 되어 형이 나한테 왔다. 우선 우리는 렌터카 회사에 가서 차를 빌렸다. 링컨 컨티넨탈이었는데 차가 엄청나게 크고 길어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를 끌고 미용실에 가서 신부를 태우고 결혼식장으로 갔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와서 식장이 북적북적했다. 잠시 후 결혼식이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나는 결혼식장 입구에 형이 준비해 준 꼬리가 긴 연미복과 나비넥타이를 매고 형과 나란히 서서 준비하고 있었고, 잠시 후 신부와 신부 들러리가 결혼식장으로 다가왔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신부 들러리가 너무 예뻤다. 예뻐도 보통 예쁜 게 아니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좀 마른 편이긴 했지만, 영화배우나 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그 정도였다.

이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신부 들러리가 신부보다 훨씬 예뻤다. 나는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신부가 나한테 오더니 들러리끼리 인사를 하라고 했다.

"Hi, I'm Elaine, nice to see you."

하고는 Elaine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악수를 했고 정신을 차려 인사를 했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내 오른쪽에 Elaine이 섰고, 신랑 신부가 우리 뒤에 섰다. 사회자가 입장하라는 말을 하자 Elaine이 내 오른쪽의 팔짱을 꼈다. Elaine의 팔이 내 오른쪽에 닿는 순간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결혼식이 진행됐고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결혼식이 끝나고 열흘 정도가 지나서 제임스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혼여행 얘기도 하고 새집 얘기도 하다가 토요일에 밥을 먹으러 집으로 오라고 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 신부가 들러리와 함께 넷이 밥을 먹는 게 관습이라고 했다.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리고는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토요일이 됐고 제임스 형 집으로 갔다. 형하고 형수님하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벨이 울렸다. 그리고 Elaine이 들어 오는데 Elaine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정신이 좀 혼미해졌다. 나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간신히 정신을 좀 차렸다. 넷이 같이 밥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Elaine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며칠 후 나는 용기를 내서 Elaine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고 나는 데이트 신청을 했다. Elaine도 흔쾌히 좋다고 했고 나는 Elaine 집으로 차를 몰고 가 그녀를 태우고 LA 다운타운을 갔다. 일단 할리우드에 가서 워크 오브 페임도 구경하고 로데오 거리도 돌아다녔다. 우리는 영화 프리티우먼에 나오는 쥴리아 로버츠와 리차드 기어가 된 것 같았다. 그 후에도 Santa Monica 해변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태평양의 끝없는 수평선도 보고 아름다운 일몰도 보고 그랬다.


어느날 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 Elaine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도 반대는 안 하셨다. 내가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게 안쓰러우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나한테 편지 한 통이 왔다. 박사과정 입학 허가서였다. 그 편지로 인해 나는 캘리포니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민을 하며 Elaine과 몇 번 더 만나는 사이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Elaine을 만나면서 사정 이야기를 하자 Elaine은 그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눈가가 조금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지지만,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이사를 하고 나서 Elaine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편지 봉투에 넣고 Elaine의 주소를 써서 가방에 넣었다. 자꾸 Elaine 생각이 났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편지를 Elaine에게 부치지 못했다. 세월은 여지없이 흘렀고 나는 그 후로 Elaine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그리고 길지 않은 인생에서 적지 않은 인연들을 만난다. 하지만 모든 인연이 어차피 끝난다. 부모, 형제, 아내, 자식, 친구, 애인, 스승, 제자. 그 어떤 인연도 끝이 없는 인연은 없다. 어쨌든 인연은 끝난다.

Elaine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laine과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만약 입학 허가서를 받기 전에 더 많이 친해졌었다면 내가 캘리포니아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살아오면서 가끔씩 그녀 생각이 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의 인연의 끝남은 어쩌면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든다. Elaine이 내 팔짱을 꼈을 때 내 심장이 콩닥거렸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녀는 지구 어느 한 곳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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