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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순간1 (연작소설)

by 지나온 시간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아침 조회를 하는 날이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솔직히 난 잘 몰랐다. 나 혼자 그냥 다른 망상에 빠져 있었다. 망상을 하다가도 얼른 조회가 끝나기만 바라고 있던 중 갑자기 머리가 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내 몸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균형을 잡고 서 있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 땅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뒤에 서 계시던 담임 선생님이 급하게 나에게 뛰어오셨고, 근처에 있는 덩치 큰 아이에게 나를 업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운동장 뒤 나무 그늘로 나를 데려다 눕히고는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하셨다. 힘에 부치셨는지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한테도 주무르라고 시키셨다.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아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고 희뿌옇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져 왔다. 정신이 든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은 “내가 너 언젠가는 그렇게 쓰러질 줄 알았다니까, 몸이 이렇게 허약해서 어떻게 하겠냐, 응? 이런 체력으로 공부는 할 수 있겠니?” 옆에 있던 친구들도 선생님 말씀에 동의하는지 나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불쌍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 되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학력고사에 포함되어 있는 체력장을 치러야 했다. 학력고사 만점이 340점이었고, 그중 20점이 체육 실기 점수였다. 100미터 달리기, 턱걸이, 제자리 넓이뛰기, 윗몸 일으키기, 공던지기, 1000미터 달리기, 모두 6종목이었다. 한 종목당 20점으로 모두 120점이었는데 이를 20점 만점을 기준으로 환산하는 방식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시작하면서 3학년 전체가 저녁 먹기 전에 체력장 연습을 운동장에서 했다. 내 어깨가 약해서 그런지 공던지기를 할 때 내가 던진 공은 다른 아이들이 던지는 공의 절반도 날아가지 않았다. 윗몸 일으키기도 20번 정도를 하고 나면 밧데리가 다 된 듯 더 이상 윗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턱걸이는 그래도 7~8개 정도는 했는데 그 이상은 아무리 해도 몸이 올라가지지를 않았다. 친구들이 배치기를 하라고 해서 나름대로 해보았지만, 배치기 자체가 되지를 않았다. 그나마 100미터 달리기하고 멀리뛰기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제일 걱정이 되었던 것은 1,000미터 달리기였다. 사실 나 같은 경우는 200미터를 달리고 나면 숨이 턱에 차서 도저히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우리 반 전체가 1,000미터 달리기를 함께 했는데 나는 한 두 바퀴를 돌고 나면 더 이상 뛰지를 못해 그냥 뛰던 중에 낙오하여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친구들이 뛰는 것을 보기만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 1,000미터 달리기에는 0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체력장을 하는 날이 되었다. 첫 번째 종목이 윗몸 일으키기였는데,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가 내 짝이 되어 내 다리를 붙잡고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 여덟, 열두울. 윗몸 일으키기 하던 내가 ‘아니 뭐지? 얘는 왜 숫자를 이렇게 세는 거지? 하나 둘도 모르나?’ 싶어 의아한 생각이 들어 윗몸 일으키기를 하다가 그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친구는 내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향해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학생들은 스무 명 정도였는데 이를 감독하는 선생님은 두 명밖에 없어 어떻게 세는지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열다섯, 스물하나, 스물여섯, 서른셋, 서른아홉, 마흔다섯, 마흔여덟, 쉰셋, 쉰여섯, 예순하나, 예순셋’. 그리고 나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이어 감독 선생님이 “그만”하고 소리쳤다. “야 거기 첫 번째 줄부터 숫자 불러”.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를 붙잡아 준 친구는 “예순셋”이라고 외쳤다. 그 친구 차례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윗몸 일으키기를 잘했다. 아마 45번 정도 한 것 같았는데 나는 “예순일곱!”이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100미터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공던지기는 모두 선생님들이 직접 측정을 하셨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지막으로 1,0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우리 반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내 옆으로 슬쩍 오셨다. 나에게 잠깐 오라고 손짓을 하셔서 갔는데, 선생님이 운동장 맞은편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한 바퀴 정도 돌고 나서 그 나무 밑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1,000미터 달리기하다가 나무 밑으로 가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출발 시간이 되었고, 우리 반 아이들 전체가 출발선에 섰다. 감독 선생님의 신호에 맞추어 60명이 한꺼번에 뛰어나갔다. 반 바퀴 돌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나무를 보니, 선생님이 그 나무 옆에 서 계셨다. 나는 일단 선생님께 달려갔다. 뛰고 있는 사람한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선생님께 달려가니 선생님께서는 “내 뒤에 와서 서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일단 선생님 뒤에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으니 내 모습이 1,000미터 달리기 감독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몸이 달아 “선생님, 저 지금 1,000미터 뛰어야 해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시면서, “선두가 4바퀴 다 돌고 반 바퀴 정도 남았을 때 그냥 애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선생님이 왜 나무 밑으로 오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나를 슬쩍 뒤돌아보더니 “너 1,000미터 뛰면 죽을 거 같아서 내가 그런다, 임마.” 선생님의 그 말씀에 나무 그늘이 유달리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선생님은 나에게 “야, 선두 한 바퀴 남았어. 들어갈 준비 해.” 하시고는 “지금이야, 너무 앞으로 끼어들지 말고 앞에서 한 열 번째 정도로 끼어들어!” 선생님 말씀이 떨어지자, 나는 다시 1,000미터를 뛰는 우리 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체력장이 끝나 친구들끼리 체력장 점수를 환산해 보았다. 우리반 아이들은 체력장이 전부 만점이었다. 19점을 받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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