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은 핵분열 현상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핵분열을 발견하는 데에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들은 물리학과 화학의 학제간 연구로 핵분열 현상을 규명할 수 있었습니다. 오토 한은 핵분열에 대한 연구로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오토 한은 187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리 세공업자였습니다. 오토 한의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한은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특히 화학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집안의 세탁실에 화학실험실을 차리고 혼자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한은 1897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는 화학에는 열성을 보였지만, 물리학이나 수학은 소홀히 했습니다. 한은 뮌헨대학의 아돌프 바이어 교수의 지도를 받기도 했으며, 1901년 감미제와 향료로 사용되는 이소유게놀에 대한 연구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1년간 군대를 복무한 후 2년 동안 박사 학위 지도 교수였던 진크케 교수의 조교로 일했습니다.
1904년 한은 영국 런던 대학의 윌리엄 램지 교수에게 가서 연구원을 합니다. 램지 교수는 비활성 기체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당시 램지 교수는 첨단과학 분야였던 방사능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한은 원래 전공이 유기화학이라 방사능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램지 교수의 능력있는 지도하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램지가 한에게 준 과제는 탄화바륨에서 라늄을 추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은 라듐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서 나온 방사선은 예상했던 것보다 2배나 많았습니다. 그가 추출한 라듐이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은 더욱 자세한 실험을 통해 라듐 덩어리 속에서 방사능을 띠는 토륨 원소를 다시 분리하였습니다.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토륨의 새로운 동위원소인 방사토륨이 발견된 것입니다.
한이 주어진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램지는 베를린 대학의 에밀 피셔가 있는 화학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은 독일로 가기 전 캐나다 맥길 대학의 러더퍼드 밑에서 1년을 더 연구합니다. 당시 한은 이미 토륨의 동위 원소를 발견했기 때문에 방사화학 분야에는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은 러더퍼드의 지도로 방사능에 대한 더욱 많은 지식과 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한은 맥길 대학에서 방사악티늄을 발견했고, 라듐, 토륨, 악티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모두 알파입자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1906년 한은 베를린 대학으로 와서 연구원이자 강사로 일했습니다. 실험실은 건물 지하실에 있었고 실험설비들은 그가 직접 설계하였습니다. 한은 베를린에서 메조토륨을 분리해 내는 등 방사화학에서 좋은 연구업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방사능에 관한 연구는 원자핵에 대한 지식을 요구했기 때문에 한은 물리학과의 콜로퀴움에도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평생을 함께할 훌륭한 동료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리제 마이트너였습니다. 마이트너는 비엔나 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추앙받던 볼츠만에게서 박사학위를 받고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물리학자였던 마이트너는 당시 독일에서는 드물었던 여성 과학자였는데 한과는 1907년부터 함께 연구하였습니다. 마이트너는 한보다 한 살 연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산책을 하지도 않았고, 같이 저녁을 먹은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연구 동료로서 30년을 보냈습니다.
한은 1910년 베를린 대학 화학과의 교수가 됩니다. 1912년에는 베를린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가 설립되었고 한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그 연구소의 방사능 분야를 이끌었습니다. 마이트너는 한의 연구실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방사능 물질에 복사선을 쏠 때 생기는 변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은 1913년 예술을 공부하던 에디스 융한스와 결혼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한은 군대에 들어가 전쟁과 관련된 연구를 수행합니다.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육군의 X선 간호사로 일합니다. 한은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 소장이었던 하버의 지휘하에 독가스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과 마이트너는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옵니다. 1917년에 마이트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물리학과 주임이 되었고, 1926년에는 플랑크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 물리학과의 교수가 됩니다.
연구 성향이 비슷한 한과 마이트너는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하고 핵과 방사능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1930년대 초는 핵과 방사능에 대한 과학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였습니다. 중성자, 양성자, 인공방사능이 차례대로 발견되었습니다. 1934년에는 이탈리아의 과학자 페르미가 원소에 중성자를 쏘는 실험 기법을 수행했는데, 중성자는 질량만 있고 전하는 없으므로 방사능 추적자로 사용하기에 적당했습니다. 마이트너는 한과 함께 페르미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서 폴로늄과 우라늄 사이의 모든 원소를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한의 제자로서 분석화학의 전문가였던 슈트라스만도 참여하였습니다.
1932년 나치가 독일 정권을 잡자 마이트너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졌습니다. 그녀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독일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수라는 신분도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때 주위의 모든 과학자들이 마이트너의 망명을 권유하였습니다. 한은 마이트너를 잃기 싫었지만 상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이트너에게 건네주고 그녀의 안전을 기원하였습니다. 마이트너는 네덜란드에서 잠시 머문 후 덴마크로 갔다가 스웨덴에 설립된 노벨 물리 연구소에 합류합니다. 마이트너가 망명한 후에도 한은 계속해서 마이트너와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상의했습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초우라늄 원소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신기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운반체로 사용했던 바륨과 란타늄이 방사성 원소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한은 현상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어 마이트너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마이트너는 우라늄의 핵분열 가능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즉 우라늄의 원자핵이 중성자를 얻어 질량이 비슷한 두 개의 원자핵, 즉 바륨과 란타늄의 원자핵으로 분열한 것이며, 방사선은 그러한 분열 조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트너의 편지를 받은 한은 슈트라스만과 함께 추가적인 실험을 실시한 후 핵분열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자연과학> 잡지에 투고합니다. 이어 마이트너는 프리슈와 함께 핵분열 반응의 물리적 특성을 규명한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합니다. 이어 프리슈의 스승인 닐스 보어는 미국 물리학회에서 핵분열 반응의 존재를 알립니다. 이로써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사이에 핵분열 소식은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 알려지게 됩니다.
학문적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던 핵분열은 1939년 졸리오 퀴리를 비롯한 프랑스 과학자들이 연쇄반응을 발견한 후 더욱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핵이 분열하면 막대한 에너지와 중성자들이 방출되며, 그것들이 또 다른 원자들을 분열시켜 점점 더 많은 에너지와 중성자를 방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핵분열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토 한과 마이트너의 이러한 핵분열에 대한 연구는 후에 핵폭탄과 핵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한은 자신의 연구에 의해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어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를 극복해 내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은 전쟁이 끝난 후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회장으로 일합니다. 한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1951년 어느 괴한의 권총에 등을 맞았고, 부인은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습니다. 1960년에는 외아들 부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합니다. 한은 1968년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쳤고, 그해 7월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같은 해 12월엔 마이트너도 세상을 떠납니다.
핵분열의 발견은 과학의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류에게 많은 피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현명한 사용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