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와 원자 세계

by 지나온 시간들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인 양자역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닐스 보어입니다.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에서 양자 가설을 제안했는데 처음에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극히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닐스 보어는 과감하게 이 양자 가설을 가지고 보어의 원자 모델을 완성합니다. 이 원자 모델은 인류가 원자라는 미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닐스 보어는 1885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코펜하겐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는데 그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보어의 아버지는 동료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토론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당시 토론의 주제는 기계적 물질관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닐스는 아버지의 토론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훗날 보어가 동료 물리학자들과 토론을 즐긴 것도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보어는 1911년 코펜하겐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공부합니다. 보어는 1911년에 <금속의 전자 이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이 논문은 철저하게 이론적으로 금속의 전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박사를 마친 후 보어는 캐번디시 연구소의 톰슨에게 가서 연구를 하려 합니다. 그러나 톰슨은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고 학생을 가르칠 만한 형편이 안 된다고 하여 자신의 제자인 맨체스터대학의 러더퍼드에게 보어를 보냅니다. 당시 러더퍼드는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적절한 조언을 했습니다.


러더퍼드는 1909년부터 원자구조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실험은 알파입자를 금박에 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했지만, 종종 큰 각도로 비껴가거나 심지어는 반사되는 것조차 발견되었습니다. 금박을 이루는 원자의 특정한 부분과 알파입자 사이에 강한 반발력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러더퍼드는 1911년에 이러한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의 중심에 원자핵이 있고, 행성이 태양 주위를 회전하듯이 핵 주위를 전자가 회전하는 원자모형을 주장하였습니다.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는 데는 적합했지만,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러더퍼드의 모형으로는 수소 원자의 불연속 스펙트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전 전자기학과 모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에 따르면 원운동과 같은 가속운동을 하는 전자는 빛을 내면서 에너지를 잃고 핵으로 빨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러더퍼드의 모형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전자가 왜 핵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채 안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보어는 러더퍼드와 공동연구를 하면서 물질을 구성하는 전자나 원자의 구조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보어는 러더퍼드에게 이러한 원자모형과 실험을 모두 배우고 고향인 코펜하겐대학으로 돌아와 교수가 됩니다. 보어는 영국에서 배웠던 것을 바탕으로 당시 물리학계의 난제인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운동과 관련되어 있는 에너지 스펙트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보어는 당시 스위스의 물리학자인 발머의 1885년 수소의 선스펙트럼에 대해 수소의 원자구조로부터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보어는 고전물리학을 이용하여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의 문제를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플랑크의 가설을 이용해 보았습니다. 플랑크의 가설도 러더퍼드의 원자가 왜 안정한지를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보어는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기로 합니다.


그는 수소 원자의 불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의 가설이었던 전자의 궤도는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감소하면서 궤도가 연속적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가설을 바꿉니다. 전자는 불연속적인 궤도를 돌며 이 궤도는 에너지의 방출과 흡수의 양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발표합니다. 그의 원자 모델은 두 가지 가설에 의존합니다. 첫 번째는 전자는 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특정한 궤도 위에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자가 높은 에너지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 궤도로 떨어지면서 빛을 방출하고 낮은 에너지 궤도에서 높은 에너지 궤도로 올라가면서 빛을 흡수하며,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하지 않으면 일정한 궤도에 머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어는 전자가 높은 에너지의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의 궤도로 전이할 때 방출되는 빛의 진동수에 대해 계산하였습니다. 보어의 가설은 수소 원자의 불연속적인 스펙트럼과 전자의 안정 상태 모두를 잘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보어는 1913년에 “원자 및 분자의 구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자신의 원자모형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같은 해에 보어는 또 다른 연구 결과를 발표합니다. 그는 X선 스펙트럼을 전자의 양자 도약과 일치시켰습니다. 1914년 이런 보어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영국의 물리학자인 모즐리는 주기율의 정확한 배열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원소들을 X선 스펙트럼으로 분석한 결과를 알아낸 뒤 그것을 바탕으로 각 원소에 원자번호를 배정하였습니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보어의 원자모형을 그리 호의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보어의 원자모형은 정량적이라기보다는 정성적인 성격이 강했고, 이에 따라 당시 과학자들은 보어의 모델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는 독일 뮌헨대학의 좀머펠트 교수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16년 타원 궤도를 가정하고 새로운 양자조건을 도입한 후 수소 원자의 미세구조를 설명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소 스펙트럼의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냈습니다. 이와 같은 좀머펠트의 개선이 있은 다음 많은 과학자들은 ‘보어-좀머펠트 원자 모형’이라고 하여 보어의 견해를 수용하였습니다.


보어의 원자모형은 고전물리학과 새로운 물리학 사이에 있었습니다. 전자가 원자핵 주변의 명확히 규정된 궤도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어의 모형은 고전적이었습니다. 고전물리학과의 차이는 전자들이 궤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원자모형은 보어의 원자모형에 기초를 두고는 있지만 조금 다릅니다. 보어의 원자모형은 전자가 입자의 성질만 가진다는 가정에서 성립합니다. 이후 전자의 파동성이 밝혀지면서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원운동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전자의 궤도나 에너지를 어느 하나의 값으로 정할 수는 없고 다만 전자가 그 위치에 존재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에 따라 요즈음엔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에 입각하여 오비탈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원자모형을 나타냅니다.


보어가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안한 것은 제1차 양자 혁명이라 불렸습니다. 양자이론에 대한 역학적 설명은 1926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통해 제시됩니다. 이것을 제2차 양자 혁명이라고 합니다.


보어는 1916년 코펜하겐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는 1922년 원자번호 72인 하프늄을 발견합니다. 보어는 이해 원자구조에 대한 이해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1921년 코펜하겐대학에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됩니다. 보어는 이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성심껏 운영하였습니다.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흔히 ‘닐스 보어 연구소’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연구소는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 독일 괴팅겐대학 연구소와 더불어 현대 물리학의 산실이 됩니다. 사실상 양자역학의 성립과 발전에 공헌했던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이 이 연구소를 거쳐 갔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 파울리의 배타원리, 윌렌벡의 스핀 개념 등이 이 연구소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보어 연구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용어로 ‘코펜하겐 정신’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말합니다. 보어는 자신의 주위에 몰려드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선입견을 버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새로운 길을 찾도록 권유합니다.


1920년대 보어는 두 가지 원리를 제안함으로써 양자역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중 하나는 1923년에 발표한 ‘대응원리’입니다. 이는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했던 모든 현상을 다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어는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원자 자체를 연구하기 전에는 고전물리학으로 여러 현상을 잘 설명해왔다는 점과 새로운 이론은 미시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대응원리는 양자이론뿐만 아니라 상대성이론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결국 보어는 대응원리를 통해 고전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소통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보어는 1927년 상보성 원리를 발표합니다. 이것은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에서 발견된 새로운계산 형식을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바탕으로 제안되었습니다. 상보성 원리에 따르면 파동 또는 입자라는 전혀 다른 배타적인 모델로 원자의 세계를 측정할 수 있지만, 원자 차원의 현상을 완전히 기술해 내기 위해서는 두 모델 모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모든 물리적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으며 각자 다른 입장에서 관찰한 결과는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서로 배타적인 것은 상보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물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와 사상 전반에도 적용되는 원리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두 방식인 물리적 분석 방법과 기능적 분석 방법이 서로 정반대의 입장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은 상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인류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유전적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적 전통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가 상보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그는 당시 독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인종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상보성 원리는 불확정성 원리와 더불어 양자역학의 확률적 특징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 두 가지 원리가 양자역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원리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양자역학의 성격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였습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유명한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빛의 입자인 광자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광자가 관여하는 시점도 정밀하게 결정하는 실험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생긴 상자가 하나 있고 그 상자 안은 밝다고 가정합니다. 즉 그 상자 안에는 광자가 있는 것입니다. 상자 내부에는 시계가 하나 있는데 그 시계는 빗장을 작동시켜 우선 한쪽 벽에 있는 작은 구멍을 잠그게 합니다. 빗장 장치의 구멍이 뚫리면 바로 광자가 상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사람들은 상자를 열기 전에 전후의 무게를 잴 수 있습니다. 이로써 광자의 무게, 즉 광자의 에너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예정된 시점, 즉 시계에 입력된 시점을 아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에너지와 시간은 동시에 결정될 수 없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사고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코펜하겐 해석은 오류로 판명될 것입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논거가 가진 약점을 찾기 위해 밤새 고민합니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논변합니다. 상자를 용수철에 매단 후 저울 바늘을 읽어 용수철의 상태와 상자를 무게를 알아냅니다. 그리고 나서 빗장이 열려 광자가 달아나면 용수철은 상승하게 되고 잠시 후 상자의 무게를 재면 광자의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수철의 운동이 정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때 시계는 지구의 중력장 안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시계의 작동에 변화를 줍니다. 그렇다면 광자가 상자를 떠난 시점을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코펜하겐 해석이 강조하는 불확정성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1920년 처음 만난 후 이러한 방식으로 평생을 물리학에 대해 논의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1936년 보어는 원자핵에 대한 연구도 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가 처음 주장했던 원자핵이 액체 방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그는 물방울을 구성하는 분자들 사이의 결합력이 달라짐에 따라 물방울의 모양이 변하듯 원자핵의 모양도 양성자와 중성자의 상호작용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이론은 1939년에 발견된 핵분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보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물리학계의 국제적 협력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일하게 됩니다. 1954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있어서도 앞장섰고, 훗날 이 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연구소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는 또한 1955년 제네바에서 열린 제1회 원자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회의에서 핵무기 통제를 위해 모든 나라가 국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57년에는 평화를 위한 원자상의 수상자가 됩니다.


보어는 1962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아들 아게 보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펜하겐대학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이 됩니다. 1965년 이 연구소의 이름은 ‘닐스 보어 연구소’로 바뀌게 됩니다.


닐스 보어는 양자 가설을 처음으로 원자 세계에 적용하여 성공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력이 원자물리학을 탄생시켰고, 이후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인류는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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