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가 살고 계셨던 곳은 정말 시골이었습니다. 집 마당에 외양간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에게 여물을 먹이기 위해 사촌 형은 새벽부터 일어나 작두로 볏짚을 잘라 커다랗고 시커먼 가마솥에 자른 볏짚을 넣어 삶았습니다. 저는 여물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소의 맑은 눈망울이 좋아서 새벽에 일어나 눈을 껌벅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곤 하였습니다. 사촌 형은 들어가서 더 자라고 했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먹을 때까지 소 옆에 한없이 앉아있곤 했습니다. “음매” 하며 우는 소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다가가 소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희 집은 시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를 키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당이 조금 있었기에 어머니를 졸라 토끼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집 대문 옆 앵두나무 밑에 토끼집을 만들어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토끼를 보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숙제는 제쳐놓고 집 뒷산으로 달려가 토끼가 먹을 풀이나 아카시아 나뭇잎을 구해와 토끼들에게 먼저 먹였습니다. 먹이를 먹는 토끼를 바라보면 토끼의 눈 또한 너무나 맑고 순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저를 바라보다 먹이를 먹고, 먹이를 먹다가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너무나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집에서 이것저것 많이 키울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집안은 지저분했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라도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요즘 들어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맑은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아마 중학교 때 매일 함께 공부하고 놀던 친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친구와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나 대학교를 거쳐 제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 10년 정도 우정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10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간 동안 그 친구는 순수했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그 친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살아있다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대를 한 지 벌써 20년이 지나고 있으니까요.
살아가다 보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관계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우정을 쌓았는데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가 그리운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아마도 지금 저는 그러한 순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 친구와 같은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를 만나든지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따뜻함을 보인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대를 접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왠지 그 기대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대만큼은 간직하려고 합니다.
기찻길은 두 개의 철로가 끝까지 평행합니다. 두 평행한 선로는 결코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연의 일부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한다고 해도, 간절히 소원을 한다고 해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이 운명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있었던 맑은 눈망울을 가진 소도, 집에서 키웠던 하얀 토끼의 맑은 눈도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순수했던 마음을 가졌던 소중한 사람도 이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주위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도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 아름다운 시간을 주었던 존재들은 저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아마 그 추억을 잊지는 못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