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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적인 집단

by 지나온 시간들

집단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우 개인의 합리적 이성은 맞서기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그 모습들을 충분히 보고도 남았다.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그러한 집단의 비이성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집단적으로, 관성에 따라, 오랫동안 되풀이된 행동들은 동기와 타당성을 요구받지 않는다. 요구되지 않는 것은 말해지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에 동력을 부여하는 것은 의식화된 신념이다. 도를 넘는 무시무시한 행동은 도를 넘는 무시무시한 의식화와 신념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쉽게 사로잡힐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행동을 쉽게 한다. 이념과 종교는 종종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동기를 제공하는 신념 체계로 작동한다. 이때 이 이념과 종교가 제공하는 신념은 일종의 알리바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집단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커다란 홍수가 모든 대지를 휩쓸어가듯 비이성적인 집단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순수한 짐승의 차원.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하는 행동은 의식적이지 않고 따라서 여기에는 작위적 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다. 몸의 본능밖에 없는 짐승처럼 순수하다. 롯의 집에 쳐들어와서 외지인을 내놓으라고 한 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이 남자들, 젊은이 노인 구별 없는 이 남자들의 행동에는 거리끼는 것, 부자연스러운 것, 짓눌린 것, 오염된 것이 없다. 의식 없는, 반성을 모르는 순수한 몸뚱이들이다. 순수한 욕망의 기계들이다.”


비이성적인 집단은 생각도 없고, 의식도 없이, 그저 배고픈 짐승이 사냥을 하듯, 개인을 먹어 치워 버린다. 인간의 윤리와 가치관도 집어던진 채 오직 집단의 목표를 위해 모든 개인은 당연히 희생양 삼아버리고 집단은 단지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롯은 자기 집에 몰려온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행동이 악한 짓임을 알렸다. 이것은 그들이 모르는 것이다. 그들이 의식 없는 몸뚱이, 반성을 모르는 기계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롯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짓이 악하다고,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그들이 모르는 나쁜 짓은 큰 무리, 무리 지어 이루어진 힘센 한 집단이 개별자로 떨어져 있는 힘없는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다수의 무리로 이루어진 집단이 집단을 이루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할 수 없는 소수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구별되지 않는 동일성의 한 세계가 낯설고 이질적인 외부자에게, 단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이다.”


비이성적인 집단에게 아무리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잊어버렸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집단으로부터 개인은 어떻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지난 세기 그 엄청난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러한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역사의 비극적 반복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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