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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남기게 될까?

by 지나온 시간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영원한 시간이 주어지는 사람은 없다. 그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떠나게 될 때 무엇을 남길 수 있는 것일까? 김성중의 <상속>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중년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매일 아침 작별한 책을 고르고, 하루나 이틀에 걸쳐 천천히 읽거나 건너뛰고, 다 읽은 책은 탁자 한쪽에 따로 두었다. 이번 생에서는 이 책과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는 굉장히 느리게 읽었지만, 그러다가 대부분의 책들을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아 되는대로 읽고 있다. 책들의 빈자리가 드러날 때마다 인생이 정리되는 실감이 든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채워질 진영의 책장을 상상했다. 이렇게 있으면 죽음은 다음번 이사하는 장소 정도로 여겨진다. 조금씩 짐을 빼고 가벼운 상태가 되어 먼 길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몇 달밖에 없다. 유산으로는 평상시 자신이 아꼈던 책이 전부였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권씩 읽어갔던 그 책들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자신이 가장 애착이 있었던 것들이기에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그 모든 책들을 남겨주기로 한다. 이생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살펴본 후 몇 권씩 그 책들을 묶어 우편으로 보낸다.


“한참 후에 돌아온 선생님은 예상보다 더 참혹한 모습이었다. 민머리에 말은 어눌했고, 어린아이와 노인을 합쳐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 앙상한 폐허에서 선생님을 추출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꼭 죽음 자체를 바라보는 일 같았다. 진영이 왔어요, 라고 언니가 말하자 선생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친 듯 침대에 누웠다. 기주 언니는 선생님의 옷을 바로잡아주고 수면양말을 새로 신긴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들은 이상한 2인조였다. 어린 스승과 나이 많은 제자에서 이제는 엄마와 딸처럼 역할이 바뀌어 있었다. 언니는 피곤해 보였지만 자기 만족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교실 안에서 올려다보기만 하던 선생님을 지금은 자기 품 안에서 돌보고 있는 형국이다. 사라진 딸의 자리에 죽어가는 선생님이 대신 들어 있는 모습이랄까. 두 사람의 모습은 다정하지만 기괴했고, 서글프지만 아름답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 많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 버린 것일까? 오래도록 계속되리라 생각했던 그 시간들이 언제 다 끝나 버린 것일까?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돌아본다. 그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그 순간에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남기게 될까?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을 남길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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