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최선이라 생각하여 선택하는 것들이 좋은 결정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하는 그 당시 우리는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선택한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선택한 결과의 삶을 과거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지나가 버린 삶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나 자신의 삶을 올곧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하는 나의 선택은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러한 선택들이 나 자신의 삶을 위하기보다는 나의 진정한 삶과는 상관없는 선택은 아닌 것일까?
정미경의 <타인의 삶>은 모두가 동경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느 한 흉부외과 의사의 이야기이다.
“벚꽃을 보러 나가자고 그토록 조를 때, 싫다며 고개를 저었던 그날 밤이 아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운명론이 아니면 견딜 수 없었던 이 며칠, 살기 위해 무언가를 삼켜야 하듯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내 앞에 나타난 현규의 얼굴을 보고서도 끝내 평정심을 가장할 수는 없었다. 잿빛 비니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이 있던 자리, 목덜미보다 흰 두피 때문일까.”
우리의 삶은 순간의 집합일 뿐이다. 그 순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축복일지 모른다.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숨어있던 삶의 그림자가 우리의 일상을 흔들고 변화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많을 것 같아도, 어느 순간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제서야 삶에 대해 간절해지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을 때의 후회는 후회가 아니다. 다만 기억의 우물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무심하고 어리석었던 시간들은 아주 잘게 쪼개져 연속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된다. 그러고는 여기쯤이냐고, 아니면 어디서부터였냐고, 다만 길이 나누어지기 시작한 그 지점을 손가락질해보라고, 다그치고 또 다그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이가 어쩌면 그나마 덜 후회를 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뜻대로 삶이 펼쳐지기를 욕심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이가 시간이 흘러 더 많은 후회를 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다. 삶은 흘러가는 강물일 뿐, 어느 지점에서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후로, 이곳에서의 삶이 그림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내내 사로잡혀 지냈어. 그 생각은 지나치게 강렬해서 결국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불의 자국처럼 내 머릿속에 박혀버렸어. 삼십 년 세월을 딱 끊어버리고 다른 길을 가겠다는 사람에게 그런 트집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날마다 만났다. 만나자 하면 현규는 나와서 내 앞에 앉아주었다.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고 각오한 표정으로. 모든 질문은 바닥날 것이고 언젠가는 지쳐버릴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우리는 얼마나 나만의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헛된 것에 나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고,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