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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15. 2023

그래도 봄밤이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비바람 불고 추운 날도 있지만, 따스하고 아름다운 봄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무르지 않지만, 그래도 꿈과 같은 봄밤을 함께 지내주는 사람도 있다. 권여선의 <봄밤>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었던 40대 중년의 남녀가 인생의 짧지만 아름다웠던 순간을 함께 하고 세상을 작별하는 이야기이다. 


  “수환은 허깨비같이 걸어가는 영경의 깡마른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녀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언제나 영경이 외출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영경은 이틀 만에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요 근래엔 이틀 만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사흘도 아니고, 나흘도 아니고, 지난번엔 일주일 만에 거의 송장 꼴이 되어 돌아왔었다. 수환은 어쩌면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합병증인 쇼그렌증후군으로 림프선이 말라붙어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소중한 사람과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영영 그 사람의 얼굴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많은 시간이 남아있을 줄 알았건만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더 좋은 시간과 기회가 있을 줄 믿었건만 시간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히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사람이 있었기에 그나마 삶을 버티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힘만으로는 살아가기에 벅찬 운명과 세월이었기에 그를 나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어떤 의미 있는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그래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따스한 봄밤같은 날들이 있었기에 그 추억을 가슴에 묻고 이제 나의 차례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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