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은 원래부터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어 있던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서 마음이 가득 차는 것은 아닐까?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고,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마찬 가지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거리는 1억 5천만 km이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는 수성과 금성만 있을 뿐 온통 빈 공간이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도 아무것도 없다. 온통 빈 공간뿐이다. 어쩌면 신은 자연을 거의 빈 것으로 채워놓았을지도 모른다. 즉, 자연의 본성은 비어있음이 원칙일지도 모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프란체스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빈곤은 어찌 보면 풍요로운 것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가슴 밑바닥에 천국을 숨겨두고 있어요. 진정한 빈곤이라면 그 밑바닥까지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 속엔 아무것도 없이 말끔해야 해요. 심지어 영생불멸하려는 의지조차도 없어야 해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거지요.”
아시시의 성자라 불렸던 프란체스코는 모든 것을 버렸다. 가족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가난을 선택했다. 그는 집안의 창고를 열어 아버지의 재산까지 모두 나누어 주고 나병환자를 돌보는 등 평생을 봉사와 가난으로 살았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는 바보였던가? 아니면 미치광인 것일까?
반야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반야심경에서 중요한 것은 공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쩌면 허상일지 모른다. 원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은 고통이나 괴로움을 모른다. 원래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느낌도 내가 아니다. 감정과 느낌은 나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집착과 욕심이 그것들을 불러왔다.
나의 감정은 그냥 잠시 왔다가는 나그네 일지 모른다. 나의 느낌 또한 손님일 뿐이다. 어차피 떠나갈 것들이다. 거기에 내가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도덕경 9장은
持而盈之, 不如其已,
就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지속적으로 이를 채우려 하면 이를 그만두는 것보다 못하며,
갈아서 이를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전하지 못한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여도 이를 지키지 못하며,
부귀하여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긴다.
공을 세우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하늘의 도리다.
노자는 무언가를 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치지 못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의미 없는 무위를 주장했을 리 없다.
진정한 나는 비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성 프란체스코는 나를 비우는 곳에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어차피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한다. 지금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지만 마음은 하나씩 비워갈 수 있다. 거기에 천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생각나는 오늘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