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고향이 아니다

by 지나온 시간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 태양계나 지구의 나이의 거의 50억 년.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런 짧은 시간 안에 우리에겐 왜 이리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지구는 먼지보다도 작은 수준이다. 우주 저 너머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이 조그만 지구 위에서는 어찌해서 그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법정 스님이 쓴 <맑고 향기롭게>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이 자기답게 살고 있을 때는 감사와 환희로 충만해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괴로워한다. 자기 몫의 생을 아무렇게나 낭비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한다. (중략) 본질적인 출가는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나 본디 자기로 돌아가는 데 그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버리고 떠남으로써 거듭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중략)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출가의 영원한 교훈이다.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아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전부 다 없애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자신을 털어 버림으로써 본질적인 자신을 크게 일깨우라는 뜻이다. 진리를 구현하려면 찾아 나서는 일 못지않게 욕망을 버리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 지구 상에 나의 소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 내 주위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내게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잠시 내 곁에 있다가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떠나듯이 나도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기에 버릴 수 있다. 버린다는 표현에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단순히 해석한다면 어쩌면 언어의 틀 안에 갇힌 사고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버리는 것은 돌려주는 것이다. 원래 나의 것이 아니기에 원래 있었던 곳으로 가라고 양보하는 것이다. 모든 영화를 버리고 떠난 싯다르타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본인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족도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버리고 떠남으로써 거듭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은 새겨야 한다. 이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다시 태어남이다. 비본질적인 나를 버리고 본질적인 나를 찾는 여행이다.


도덕경 10장은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孀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영백에 타고 하나를 안아,

능히 이 둘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정기를 집중하여 유연한 자세를 이루어,

진실로 영아가 될 것인가?

마음속을 깨끗하게 하여 흠이 없게 할 것인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려 진실로 무위를 행할 것인가?

천문을 열고 닫아 진실로 여성이 될 것인가?

명백히 깨달아 진실로 억지로 함이 없을 수 있는가?

도를 낳게 하고 덕을 축적한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장성시키되 지배하지 않으니,

이것을 진정한 덕이라 한다.


노자는 간파했다. 나의 가족도 내 것이 아니며, 내가 하는 일도 내 것이 아니다. 나로 인해 무언가가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다른 것으로 인하여 함께 생득한 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쓴 글도 내 것이 아니다. 읽는 사람으로 인해 해석하는 것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은 없다.


버리고 떠나는 것에는 어떤 용기나 생각이나 결심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이 그렇게 만들었기에 아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버리고 떠나기를 고민한다면 아직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제 그런 미련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찰나를 살다 가는 이 지구에서 우리는 그저 나그네일 뿐이다. 고향이란 본래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닐까? 이 지구 상에서 어쩌면 정말 짧은 시간을 잠시 머무르다 가는 것인데, 나의 본향이라면 보다 자유롭고 평안하며 안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진정한 고향, 그곳은 아픔도 슬픔도 없고 재산이나 명예도 필요 없는 평안한 곳임에 분명하다. 언젠가 고향이 아닌 나그네 신세였던 이 지구를 떠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올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은 전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나의 진정한 고향으로 가는 여행의 시작일 뿐이다. 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한 죽음은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의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답이 없기에 단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이것은 철저한 나만의 주관적 생각에 불과하지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자유로운 여행의 시작일지 모른다. 나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그러기에 어떤 죽음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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