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됨은 버림에 있었다

by 지나온 시간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내가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글이다. 지금도 가끔씩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을 다시 꺼내 읽곤 한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지 소유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세월을 지내며 점점 소유적 인간으로 변모해 간다. 순수한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가지고자 노력할 뿐이다. 어차피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고자 노력은 해 보았을까?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가지고자 하기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나를 잃게 된다. 자유롭지 못한 채 다른 것들에 얽매어서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 삶은 한 번뿐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집착으로 인한 나의 존재는 삶의 그늘에 묻혀 지내고 있는 슬픈 나의 이면일지 모른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버려야 한다. 자유롭게 날아오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버리고 가벼워져야 한다. 내가 신경 쓴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오만이며 몽상일 뿐이다. 많은 것을 버릴수록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세상은 세상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다 그들의 길이 있다. 내가 집착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도 나의 소유라 생각하기에 서로가 힘이 든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같이 좋은 시간을 함께하면 좋을지 모르나 더 많은 걸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다. 그저 그렇게 서로 자유롭게 각자의 존재자로 만족해야 한다. 내가 나를 버리는 순간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그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란 것을.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기 차례를 맞이할지 모를 인생이 아닌가. 살아남은 자인 우리는 채 못 살고 가 버린 이웃들의 몫까지도 대신 살아 주어야 한다. 나의 현 존재가 남은 자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느냐가 항시 조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을 마치고 저마다 지붕 밑의 온도를 찾아 돌아가는 밤의 귀로에서 사람들의 피곤한 눈매와 마주친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은 용하게 살아남았군요.’ 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살아남은 자가 영하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화목에 거름을 묻어 준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살아남은 자들이다.”


살아 있다는 것만큼 가슴 벅찬 것이 있을까? 살아 있으니 내가 있고, 그러기에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살아 있음은 버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버리다 보니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이제는 참된 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넉넉하게 아무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많은 일을 하는 순간들로 삶을 채워갈 수 있다. 나의 나 됨은 버림에 있었다.



이전 09화삶의 끝자락에서도